[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
5·16
새벽을 가른 총성… ‘쿠데타 軍’ 일시에 전국 장악
1961년5월 16일 낮계엄사무소가 설치된서울시청 앞에서시민들에게 모습을보인혁명군 지도부.
육군참모총장장도영중장(왼쪽)과육군제2군부사령관 박정희소장이나란히 서있다.동아일보DB
“땅 땅 따땅”
1961년 5월 16일 새벽, 김지하는 자취방에서 자고 있다가 때 아닌 총소리를 듣고 깼다. 1년 전 4·19 이후 처음 듣는 총소리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뒤척이다 동 트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시내에는 이미 군(軍)이 진주해 있었다. 5·16이 일어난 것이다.
이날을 국민들은 어떻게 맞았을까. 마침 당일자 경향신문에 ‘쿠데타 겪은 전국 치안은 평온, 기자가 본 혁명군 입성’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서병현 기자의 특종기사였다. 야근을 마치고 회사 지프차를 몰고 집(동작구 흑석동)으로 돌아가던 서 기자는 5월 16일 새벽 2시 50분에 김포 방면에서부터 서울로 입성한 ‘혁명군’과 이를 저지하려던 헌병들 간에 벌어진 총격전을 목격하게 된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강 인도교에 다다르자 북한강파출소 남방 5m 지점에 무슨 공사를 하는지 땅이 패어 있고 군인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십여 명의 헌병이 뛰어나와 통행을 막으며 “사고가 났으니 되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리는 순간 ‘팡! 팡!… 팡!’ 인도교 남쪽에서 수십 발인지 수백 발인지 총탄이 날아왔다. 헌병들은 이내 몸을 피했다. 나는 다시 속력을 내어 삼각지에까지 다다랐다. 총성은 뒤에서 계속 들렸다. 삼각지파출소에 들어가 무슨 일인지 물었으나 순경들은 자신들도 모른다고 했다. 경비전화로 용산경찰서와 시경 및 북한강파출소에 물었으나 그들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약 10분 후 200여 명의 해병대원이 헌병들과 충돌한 것이라는 ‘뉴스’를 경비전화로 입수했다. 잇달아 서울역 쪽에서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10여 대 트럭에 분승하여 육군본부 쪽으로 들어갔다. 총성은 남쪽에서 계속 울렸다.’
서 기자는 “군부 ‘쿠데타’란 것은 염두에도 못 둔 나는 그때까지도 단지 군인들끼리의 싸움을 헌병이 막으려고 시도하는 줄 알았다. 심상치 않은 동태에 놀라 신문사에 조간 개판(改版) 준비를 부탁하는 한편 ‘데스크’에 연락한 후 곧 용산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그러고 용산경찰서에서 ‘쿠데타군’과 맞닥뜨린다.
‘새벽 4시 30분경이 되자 총성이 또 울렸다. 수대의 트럭이 용산서 쪽으로 진격해오는 것 같았다. 이후 급작스런 고함소리와 함께 1개 중대의 해병대원들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몰려왔고 나는 중대장(대위)에게 인도되었다. …그는 나의 웃옷 ‘포케트’에서 신분증을 꺼내보더니 신문기자임을 알자 “안심하시오. 이젠 다 끝났소. 우리의 행동을 잘 보도해주시오”라고 당부했다.’
서 기자는 ‘이때서야 쿠데타라는 걸 알았다’며 중대장에게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쾌히 승낙했다고 전한다. 서 기자는 곧 이 중대장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이렇게 썼다.
‘이제 30을 갓 넘었을 중대장은 경찰서 내에 있던 모든 인원을 정문 앞에 앉히고 부하들에게 폭행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지나가던 차량을 징발하여 경찰서 앞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어 자신들이 취한 행동을 “어떤 정당이나 단체의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고 불안정한 이 나라 정세를 바로잡자는 구국의 일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 후 “우리가 일선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겨우) 35분 걸렸다. (북한) 괴뢰가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오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저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정쟁에만 여념이 없으니 이 나라를 그냥 둘 수 있느냐”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이 일에 가담, 아니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지만 군부가 정권을 잡아 이 나라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중대장과 서 기자의 문답.
―이 일은 해병대 단독인가. 딴 군에서도 가담했는가.
“딴 데서도 가담하고 있다. 조금 후에 항공기가 서울 상공을 날 것이며 오늘 낮에는 인천 앞바다에 함정이 도착할 것이다.”(이는 3군이 합동한 것을 뜻한다.)
―3군의 고급장성도 이 일을 아는가.
“알고 있다.”
―한강에서 사상자가 났는가.
“헌병들이 저항해 내 부하가 한 명 사망하고 나는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서 기자의 기사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그는 병원에 가자는 부하들의 권고를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물리쳤다. …헤어질 때 그 중대장은 부상으로 쩔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굳게 악수한 후 “우리의 의도를 국민에게 잘 알려 달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16일 새벽 3시 반을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 및 항만지구 접수를 완료한 ‘군사혁명위원회’는 16일 새벽 5시 방송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유엔헌장을 중시하며 구악을 일소하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경제재건에 주력한다는 ‘혁명공약’이 발표됐다. ‘과업이 성취되면 언제든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훗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계엄령이 선포된 대한민국에는 불안과 긴장 그리고 기대가 엇갈렸다. 1961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는 5·16 첫날을 맞은 전국 곳곳의 표정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무장 군들이 요소마다 교통차단을 했다. ‘작전’이란 딱지를 붙인 군 트럭들이 수없이 늘어섰고 ‘받들어 총’ 자세로 총총히 늘어선 군인들에게 이따금 시민들이 ‘누구 명령이냐’ 묻는 말에도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도심은 물론 변두리까지 파출소가 일제히 문을 닫았다. 16일부터 서울시내 은행과 일부 상점들은 문을 닫고 각급 학교들도 오후부터는 수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명동은 여전히 인파가 들끓고 긴박한 정세에 아랑곳없는 ‘호사’를 구가하고 있다. 시장 시세는 쌀, 콩 등이 조금 올랐다.’
지방 표정을 전하는 기사들에는 쿠데타를 적극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보여 주목된다.
‘광주 시내 숭의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은 ‘쿠데타’를 환영하는 데모를 했는데 이로 인해 교장이 ‘옥외집회위반’ 혐의로 계엄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전주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며 이제는 모두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잠겨있고 부패한 장면 정권은 잘 넘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 어수선하다.’
동아일보는 5·16 직후 시민들의 심경을 한마디로 “어리둥절…불안 반 기대 반이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다
‘광화문네거리에서 직업이 없다는 40대 한 신사는 “좌우간 이 무위 무능한 (장면) 정권 아래서 굶어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결과야 어떻든 군대의 행동이 시원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은행 앞에 모인 군중 가운데 한 사람(운전수)은 “뭔가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태도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격변의 소용돌이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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