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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사 예고편, 청년 마오쩌둥의 ‘신촌’ 실험

淸山에 2013. 3. 9. 18:29

 

 

 

 

 

 

인민공사 예고편, 청년 마오쩌둥의 ‘신촌’ 실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1>김명호

 | 제312호 |

 

 

 1954년 9월, 국방위원회 1차 회의를 마친 마오쩌둥(앞줄 왼쪽 여덟째)과 펑더화이(앞줄 왼쪽 아홉째).

이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진 김명호] 

 


1535년 7월 초, 런던 탑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전 대법관 토머스 모어가 단두대 앞에 섰다. 두 눈이 가려지는 순간 초승달 모양의 섬나라, 유토피아가 눈앞에 출현했다. 청년시절, 이 냉철한 몽상가는 사유재산이 없고 섬 전체가 행복하고 유쾌한 생활을 영위하는 허무의 고향, 유토피아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인류가 수천 년간 꾸어온 꿈이다 보니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1824년, 맨체스터의 부유한 공장주 로버트 오웬이 미국 인디애나주의 이민구 한 곳을 15만 달러에 사들였다. 사람의 힘에 의존해 곡식을 경작하는 농업공동체, 뉴하모니타운을 건설했다. 오웬이 만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실험장은 5년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한 독일계 유대인이 대영박물관을 노크했다. 도서실에 틀어박힌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시체 표본 취급했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해부해 보니 토머스 모어의 이상과 인류의 꿈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자칫하면 곡해할 소지가 많았지만, 몽상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과학적으로 천명(闡明)했다. 한동안 잠복해 있던 유토피아의 유령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국도 공구(孔丘)와 묵적(墨翟)을 시발로 진시황에게 최초의 도전장을 던진 진승(陳勝), 오두미도(五斗米道)의 3대 교주 장노(張魯),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 시인으로 더 알려진 당(唐)대 최고의 검객 이백(李白), 청(淸)제국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지도자 홍수전(洪秀全) 등 면면히 내려오는 이상사회의 계보가 있었다.

20세기 초, 후난(湖南)성의 키 크고 삐쩍 마른 농민의 아들, 마오쩌둥이 창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 인근을 답사했다. 목적은 단 하나, 중국형 신촌(新村) 부지의 물색이었다.

청년 마오쩌둥이 구상한 신촌은 유아원과 양로원, 상점, 학교, 농장 등이 공동으로 운영되는 표준형 유토피아였다. 실현만 된다면 400년 전 런던 브리지에 효수된 토머스 모어의 영혼을 위로하고도 남았다.

후난은 중국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수많은 영웅과 강도들의 고향다웠다. 골목마다 크고 작은 도둑투성이였다. 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너나 할 것 없이 혁명을 노래하던 시대였다. 마오쩌둥도 혁명에 몸을 던졌다. 마르크스의 이론과 중국의 현실을 결합시킨 지 40년 만에 정권 탈취에 성공했다. 960만㎢의 대지 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상사회 건설의 꿈이 되살아났다. 권위와 기백과 열정으로 6억5000만 명을 몰아붙였다.

철강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작은 용광로가 마을마다 들어섰다. 한군데 모여 공짜 밥을 먹다 보니 솥, 수저, 냄비 등은 쓸모가 없었다. 눈만 뜨면 일터로 향하고,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앞치마를 둘러야 했던 남자들은 환호했다. 굴러다니는 쇠붙이를 몽땅 들고 용광로로 향했다. 용광로 땔감으로 쓰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도 모조리 베어냈다. 철 생산량이 유토피아의 발원지 영국을 추월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인민공사처럼 희한한 곳도 없었다. 일을 열심히 한 사람과 빈둥거리며 눈치만 보던 사람의 배당량이 똑같았다.

이성적인 미몽(美夢)이 하루아침에 비이성적인 악몽으로 둔갑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상하이의 경우 연료가 일주일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방 간부들은 과장된 보고서 작성에 머리를 싸맸다.

20세기 중엽에 시작된 거대한 드라마는 1987년 10월, 중공 13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론이 채택되면서 막을 내렸다. 1959년 7월 23일 오전, 여산회의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던 펑더화이의 주장이 마오쩌둥의 한마디에 휴지조각으로 변한 지 28년 만이었다.

펑더화이와 함께 쫓겨났던 전 중공 선전부 부부장 리루이(李銳)는 ‘여산회의 실록’에서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간부들의 성향을 “관료주의에 빠져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헛소리만 해대는 간부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며 거짓 보고만 일삼는 뺀질뺀질한 간부들. 허위인 줄 뻔히 알면서 진실인 것처럼 늘어놓는 고급 간부들”로 분류하며 “마지막 유형이 가장 나쁜 놈들이었다”고 단정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