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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광개토왕릉비' 中서 발견… "고고학 대사건"

淸山에 2013. 1. 17. 10:22

 

 

 

 

 

'작은 광개토왕릉비' 中서 발견… "고고학 대사건"
김기철 기자

 

 

지안 주민이 강가에서 발견해 신고… 세번째 고구려碑


학계 "자료 희귀한 5세기 고구려사 연구 획기적 단서"
'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등 도입부 광개토왕릉비와 같아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지방제도를 밝히는 계기가 됐다. 지안 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한국고대사학회 총무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현에서 광개토왕릉비의 축약판처럼 닮은꼴의 고구려 석비(石碑)가 발견됐다. 고구려비로는 414년(장수왕 3년)에 세운 광개토왕릉비와 역시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에 이어 세 번째다.

 

지안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로 고분 등 고구려 유적이 밀집된 곳이다.

국내 역사학계는 "지안 고구려비 발견은 고고학 대사건"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 사회제도를 밝혀줄 귀중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선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5세기 고구려사의 베일을 벗기는 데 지안 고구려비가 획기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안 고구려비 어떻게 발견됐나

 

중국 국가문물국이 발행하는 소식지 '중국문물보(中國文物報)'는 지난 4일 발행한 잡지에서 작년 7월 29일 마셴현 주민이 마셴하(河) 강가에서 비석을 발견, 지안시 문물국에 신고했다고 소개했다.

 

마셴현은 1000기가 넘는 고구려 묘가 집중된 곳으로 이중 왕릉으로 알려진 천추묘(千秋墓), 서대묘(西大墓)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중국문물보'에 따르면 고구려비는 천추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456m, 서대묘는 서남쪽으로 1149m 떨어진 곳에서 출토됐다.

 

지안 고구려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관리하는 내용을 담은 '수묘(守墓)비'로 보인다.

 


  ◇지안 碑의 내용은?

 

414년 장수왕 때 건립된 광개토왕릉비는 1880년대 일본이 비문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비문은 주몽의 건국 신화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왕의 세계(世系)에 이어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업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했고, 마지막으로 능을 지키는 사람인 '연호(烟戶)' 명단과 관리 규정이 기술돼 있다.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축약한 것처럼 흡사하다. 비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일부 사라진 이 비엔 예서체로 글자 218자가 새겨져 있는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다.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는 첫 행은 광개토왕릉비의 시작 부분과 글자까지 똑같다. 이어 '○○○子河伯之孫'으로 '주몽이 하백(河伯·물의 신)의 손자'라고 출신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왕릉비가 주몽을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고 소개한 것과 비슷하다. 글자가 없어진 비 앞부분이 '천제의 아들'(天帝之子) 등 고구려의 천손(天孫)신화를 밝히는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이어 "'연호'를 두어 사시(四時) 제사를 지내게 했고" "부유한 자들이 수묘자를 사고팔았다" "비(碑)를 세워 연호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 수묘자는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고 쓰여 있다.

 

화강암으로 세운 지안 고구려비는 높이 173㎝, 너비 60.5~66.6㎝, 두께 12.5㎝로 무게는 464.5㎏이다. 비문은 모두 10행으로 마지막 10행만 20자이고, 행마다 22자를 적었다. 1775자로 알려진 광개토왕릉비에 비해 8분의 1정도 분량이다.

 

 

 

 

 

 

 

 

중국 지안서 제2 광개토대왕비 발견
[중앙일보]

 


비문 내용, 글자 모양 비슷 … 218자 중 140자 판독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또 하나의 고구려 비석이 발견됐다. 기존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하면 크기는 작지만 새겨진 내용이 유사해 ‘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추정된다. 기존 광개토대왕비는 같은 지린성 내 지안시 퉁거우(通溝)에 있다.

 

 이번 비석은 광개토대왕비, 충주 고구려비에 이어 세 번째 고구려비다. 한국고대사학회 총무이사인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를 비롯해 고구려 전공 회원들이 연구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여 교수는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내는 ‘중국문물보’ 1월 4일자에 고구려 비석 발견 기사가 실렸다”고 말했다.

 

 

  비석의 높이는 1m73㎝, 너비 60.6∼66.5㎝, 두께 12.5~21㎝, 무게 464.5㎏이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결실된 상태다. 비석 정면에 예서체로 218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다. 기존 광개토대왕비의 높이는 6m39㎝에 글자 수는 1775자다.

 

 이번 비석은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건하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는 구절로 시작한다. 추모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킨다. ‘하백의 손자(河伯之孫)’ ‘나라를 일으켜 후대로 전해졌다’는 구절도 보인다. ‘중국문물보’는 “추모왕의 고구려 창업을 서술한 대목은 기본적으로 기존 광개토대왕(중국은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부름) 비문과 내용이 같다”고 설명했다. ‘연호(烟戶)’ ‘사시제사(四時祭祀)’ 등에 대해서는 “글자 모양이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하다”고 추정했다. ‘연호’는 집을 뜻하는 가호(家戶)로 해석된다.

 

 또 ‘수묘인(守墓人·묘 관리인)’이 언급돼 있어 주목된다. ‘부유한 자라도 수묘인을 함부로 팔 수 없다’는 뜻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이후로는 수묘인을 다시 팔 수 없다’고 한 광개토대왕비 내용과 유사하다. 이번 비석은 마셴촌에 사는 한 촌민이 지난해 7월 29일 마셴강 우측 강변에서 발견해 국가문물국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 교수는 “광개토대왕비와 연관성이 분명하고 수묘인이 언급된 점도 흥미롭지만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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