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형뉴옥인장 도장면
“환인이 환웅에게 줬다는 천부인(天符印)은 실존한 도장이다”
-옥인장에 새겨진 부호 추적하면 한글 원리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고대 역사서는 도장(印)이 지도자의 징표였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다.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사람 사는 세상을 탐냈다. …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昔有桓因 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는 내용이 있다.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이라는 도장 세 개를 줬다는 것은 사실일까.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의 국가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환인과 환웅이 있었던 시절은 신석기 시대가 분명한데, 그때 도장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밝히면 도장은 있었다. 상명대 박선희 교수(역사콘텐츠학)가 유물 분석을 통해 이를 증명해 냈다.
우하량에서 나온 여신상, 웅녀족(熊女族) 실존 증명
한동안 우리 사학계는 고조선의 실체를 부인했다. 그러나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시 홍산(紅山)구 일대에서, 중국 역사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다량의 신석기-초기 청동기 문명이 발견되자 급변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 서기전 8000년경부터 이 지역에 거대한 신석기 문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 문명을 ‘홍산문명’으로 통칭했다.
찬란하게 꽃피던 홍산의 신석기 문명은 후기에 들어 금속기를 만들더니 초기 청동기로 넘어갔다. 초기 청동기 문명은 하가점(夏家店)이라는 곳에서 땅을 깊이 파서 발견됐기에, ‘하가점 하층문화’로 불리게 됐다. 깊이 파지 않아도 발견되는 하가점 상층문화는 후기 청동기 문명이다. 삼국유사는 서기전 2333년 고조선이 출범했다고 했는데, 하가점 하층문화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삼국유사’는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고 세상을 교화하다 21일간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버틴 곰이 변한 여자와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주해온 환웅족이 곰을 숭배하는 웅녀족과 결혼동맹을 맺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홍산문명이 펼쳐졌던 우하량(牛河梁)이라는 곳에서, 흙으로 빚은 곰상(熊像)과 여신상의 파편이 발견됐다. 웅녀족의 흔적이 나온 것이다.
우하량 여신묘 곰발 토기
우하량여신묘 복원 가상도
흙으로 빚은 동물상 파편을 곰상의 것으로 판단한 이유는 머리부에 넣었던 것으로 보이는 곰의 턱뼈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후기 신석기인들은 돼지를 키웠는데 돼지에게는 발굽이 있다. 곰 턱뼈가 발견된 곳에서는 발굽이 아니라 발톱이 있는 육식동물의 발을 빚은 조소상(彫塑像) 파편이 발견됐다. 곰 뼈가 발견됐으니 이 파편은 곰상의 것으로 판단됐다.
그리고 두 눈에 푸른 옥(玉)을 박아 형형한 느낌을 주는 사람 얼굴상이 나왔다. 이 얼굴상과 한 몸이었던 것 같은 여성의 젖가슴과 가부좌를 튼 다리의 조소상 파편도 발견됐다. 중국학자들은 이 파편을 근거로 그곳에 여신과 곰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웅녀족의 실존을 간접 확인한 것이다.
우하량 여신두상-요녕성박물관
여신상 눈에 박힌 푸른 옥은 신비한 느낌을 준다. 왜 후기 신석기인들은 여신상의 눈에 옥을 박아 넣은 것일까. 이유는 옥을 자유자재로 다뤘기 때문이다. 후기 신석기는 돌을 갈아서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다. 그런데 옥은 돌보다 훨씬 무르니, 후기 신석기인들은 옥을 갈아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귀고리, 목걸이, 장식품 등등…. 중국학자들은 이를 ‘옥기(玉器)’로 통칭한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은 한국인에게 고토 회복의 의지를 심어줄 수도 있기에 중국은 적극적으로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곳을 열심히 방문해, 많은 옥기를 생산한 후기 홍산문명이 삼국유사에서 언급된 신시이고,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시대라는 것을 확인해 왔다.
발굴당시 우하량 여신 두상
지난 10월 13일 박 교수가 단군고조선학회에서 발표한 ‘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란 논문은 이러한 판단을 가일층 강화해준다. 후기 홍산문화인들이 옥으로 만든 다양한 도장(玉印)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홍산문화에서 일어난 것이 한국 문화라면, 중국 문화는 황하중류에서 일어난 황하문화다.
중국인들은 황하 중류에서 하(夏)-은(殷)-주(周)나라를 차례로 세웠다. 주 나라 말기에 제후국들이 독립해 싸우면서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갔다가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이 하나라보다 먼저 건국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하가점 하츰문에서는 하나라보다 800년 앞선 청동기들이 출토됐다. 이러한 하를 이은 은나라의 유적지가 하남성 안양(安陽)현의 은허(殷墟)다.
중국은 이 은허에서 서기전 11세기에서 서기전 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리도장(銅印章) 세 개를 발견했다. 그래서 이 동인장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장인 줄 알고 있었는데, 홍산지역인 내몽골자치구 나만기(奈曼旗)라는 곳에서 으로 만든 도장(玉印章) 두 개가 출토되면서 뒤바뀌어 버렸다.
이 옥인장은 몸체에 구멍이 뚫려 있어 끈을 넣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끈을 한자로 ‘뉴(紐)’라고 한다. 중국학자들은 모양에 따라 이 옥인장의 이름을 지었다. 동물모양의 것은 ‘동물형뉴(動物形紐) 옥인장’, 머리가 두 개인 새처럼 보이는 것은 ‘쌍두조형뉴(雙頭鳥形紐) 옥인장’으로(사진 참조).
이 옥인장이 서기전 4500년에서 서기전 3000년 사이 부흥했던 신석기 문명인 ‘홍산문화’ 유물과 함께 출토됐기에, 중국학자들은 이것이 은허의 동인장보다 오래됐다며, ‘중화민족제일인(中華民族第一印)’으로 평가했다. 도장면에는 새겨진 글자인지 부호인지는 전혀 해독하지 못했다.
동물형뉴옥인장
쌍두조형뉴옥인장
쌍두조형뉴옥인장 도장면
동물형뉴 옥인장은 길이가 4.5cm이고 도장면의 가로 세로 폭은 1.9×1.1cm였다. 쌍두조형뉴 옥인장은 길이가 1.8cm이고 도장면의 가로 세로는 2×1.8cm였다. 두 옥인장의 도장면 크기는 요즘 도장과 비슷한 것이다. 도장면은 지금 도장과 똑 같이 양각(陽刻)을 했는데, 흥미롭게도 두 인장의 도장면에 모두 붉은 색 안료가 묻어 있는 것이 발견됐다.
이 안료는 주사(朱砂: 붉은 모래성분)가 아니고 자석분(赭石粉, 붉은 돌가루 성분)으로 판단됐다. 후기 신석기 시대에는 종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홍산인들은 이 도장을 어디에 찍었을까. 박 교수는 고대 의복 전문가다. 그는 다양한 연구를 통해 후기 신석인인들은 지금처럼 옷을 해입었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박 교수는 이 도장은 천에 찍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한민족의 도장 문화가 중국으로 흘러갔다.
따로 일어난 홍산문화는 황하문화와 섞이지 않았다. 두 문화는 청동기 시대에 들어간 후 교류했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 한민족의 도장문화가 중국인들에 건너가 그들도 도장을 만들게 됐다고 보아야 한다. 나만기의 옥인장의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한민족최초인(韓民族最初印)’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도장 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홍산문화보다 먼저 일어난 소하연의 채색 도기(채도)에는 글자와 비슷한 부호가 여러 종류의 색채가 가미돼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호는 다른 질그룻에서도 숱하게 발견된다. 박 교수는 이것이 발전해 도장 문화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후기 신석기 시대 옥기를 소유한 귀인들은 옥으로 만든 도장을 소유했다. 그렇다면 도장은 지배자를 상징하는 징표가 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천부인은 실존했던 것이다. 한자 전서(篆書)는 도장에 새겨 넣던 글자에서 발전했다. 한글의 모양은 네모 반듯하다. 도장면에 넣기 좋은 형태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도장면에 새겨녛던 부호나 글자에서 파생된 것은 아닐까.
도장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면 신시와 한글의 비밀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예상외로 오래되고 독창적이었다. 중국 땅에 있으면 누구의 역사이든 모두 중국 역사라고 하는 것이 동북공정이다. 동북공정을 극복하려면 삼국유사 등을 홍산과 하가점문화의 유물 유적과 정치하게 비교해가는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