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圖經은 황제에게 바친 보고서 형식의 책으로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예술, 풍속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송대 중국인이 저술한 책이지만 제대로 된 고려시대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高麗圖經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일설에는 고려가 편찬한 高麗圖經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高麗圖經에 묘사된 고려인들의 모습은 구한말 일본의 정탐꾼 혼마 규스케(本間九介)가 조선잡기(朝鮮雜記)에서 묘사한 조선 사람들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朱子學에 빠져 ‘관념의 유희’를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과 비교해 고려인들은 상무적-실용적이었다. 특히 高麗圖經 8권 인물편에는 三國史記의 저자인 김부식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제8권 인물
《오랑캐 중에서는 고려에 인재가 가장 풍부하다...(중략) 이번에 사자가 고려에 들어가니, 모든 신하들 중에서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뽑아 영접하는 예를 맡겼다...(중략) 金씨는 대대로 고려의 문벌가문이어서 이전의 사서에도 이미 실려 있다. 金씨는 朴씨와 가문의 명성이 서로 비등하여 그 자손들 가운데는 글과 학문이 뛰어나 등용된 사람이 많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큰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의 신망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다. 그의 아우 김부철 또한 시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찍이 그들 형제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보니, *소식-*소철 형제를 사모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소식(蘇軾, 소동파):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
*소철(蘇轍): 소식의 아우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제11권 의장과 호위
《고려 왕성의 의장과 호위는 다른 군보다 훨씬 성대하다고 한다. 날랜 군사가 모두 모였으며, 중국의 사절이 이르면 이들을 모두 보내 영예로운 모양을 과시한다. 백성이 16세 이상이면 군역에 충당되는데, 6위의 상번하는 군사는 항상 관부에 머무르고, 나머지 군사에게는 모두 전지를 지급하여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무장을 하고 적지로 달려가고, 일을 맡으면 또 그 일에 종사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농토에 복귀하니, 우연하게도 옛날의 향민제도(중국 고대 지방제도)에 부합된다. 위나라 때 고구려 호수는 3만에 불과하더니, 당나라 고종이 평양을 함락시켰을 때는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은 전대에 비해 또 배가 늘어났다.》
제19권 백성(民庶)
《고려는 장인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장작감이 그런 곳이다. 이들은 평상시에 흰 모시 도포를 입고 검은 건을 쓴다. 다만 역을 맡아 일을 할 때는 관에서 자주색 도포를 내린다. 또 듣자니, 거란에서 항복한 포로 수만 명 중에 장인이 열에 한명인데, 그 중 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왕부에 머무르게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요즈음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과 복장이 더욱 세련되었다.》
제22권 잡속(雜俗)
1.《고려의 풍속은 관리나 병졸이 기율이 엄하기는 하나, 평소에는 자질구레한 예를 일삼지 않는 것 같다. 무릇, 국상이나 종관도 오가다가 자기 소속의 관원과 만나면 반드시 얼굴을 가다듬고 기립한다. 다른 부서의 관원들 끼리나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한 낮은 벼슬아치들끼리는 거리에서든 궁정에서든 반드시 배례를 하는데, 관직에 있는 자도 역시 고개를 구부렸다가 펴서 답해하는 시늉을 한다.》
2.《고려를 다룬 옛 사서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다 깨끗하다 했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고려 사람들은 번번이 중국인이 때가 많다고 비웃는다. 고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냇가에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구별 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벌거벗는데, 이런 일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어어서,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