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입하다 보면 우측에 철망으로 '유폐'된 광해 묘지가 그 등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광해 묘 아래 몇백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들어선 여러 축사에서 나오는 악취가 진동하고 축생들의 울음소리가 묘역을 가끔 흔들어놓는다. "바로 이 때문에 광해 임금 묘를 다른 임금 묘들과 달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 제외하였다"(상지영서대 이창환 교수). 게다가 산의 얼굴 쪽에 무덤이나 집터를 잡는 것이 풍수의 기본 상식인데, 산의 등 쪽에 광해 묘가 있어서 풍수상 금기를 범하고 있다. 배신과 배반의 땅이다.
광해는 다른 임금들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사주와 풍수 행위를 보면 몰락은 당연했다. 광해와 대학자 정인홍은 정치 생명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정인홍은 광해의 '킹메이커'였다. 그런데 이 둘 모두 '사주와 풍수 마니아'였다. 광해는 점보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대신들이 좌도(잡술)를 삼가라고 간언할 정도였다. 특히 관상감 소속의 술사 정사륜에게 의지하여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점을 치고 나서 실행에 옮겼다. 광해에게 정사륜이 있었다면, 정인홍에게는 시문용이 있었다.
시문용은 명나라 군인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된 뒤 경상도에 머물렀다. 이때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를 지키던 정인홍과 만나는데 두 가지 사연 때문에 각별해진다. 하나는 정인홍의 선조 고향이 원래 중국 절강성(浙江省)이었는데 시문용 역시 절강성 출신이었다. 정인홍은 시문용을 동향 사람으로 여겨 각별하게 대했다. 다른 하나는 시문용이 풍수와 사주에 능했다는 점이다. 정인홍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시문용에게 점을 쳐서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하였을 정도였다"(신흠의 '상촌집'). 정인홍의 추천을 받은 시문용은 광해의 지관이 되었다.
광해는 인왕산 아래 세 개의 궁궐을 짓는 대역사를 일으켰다. 기존의 경복궁과 창덕궁 터가 불길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집터인데,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빼앗은 것이다(지금의 경희궁). 세 개의 궁궐이 조성된 것도 지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에 그 의견들을 모두 수용한 결과였다. 이때 활동한 지관은 시문용, 성지, 김일룡, 박자우 등이었다.
재정 파탄, 백성들의 원성과 민심 이반은 당연한 일! 오죽하면 사관(史官)들이 이를 통탄하는 글을 실록 곳곳에 남겼을까. 역사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과 대운하를 뚫었던 수문제 모두 대규모 토목공사 때문에 망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쫓겨나고 정인홍과 그 당파(대북파)가 많이 죽임을 당한다. 광해의 지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지·시문용·김일룡·복동은 모두 도망가 숨어 있었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광해는 풍수로 망했다. 그렇다면 풍수설은 없는 것일까?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로 집을 빼앗긴 정원군의 아들이 광해를 이어 인조 임금이 된 것을 보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