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맥아더의 불철저한 개혁이 만든 '천황제 민주주의'

淸山에 2009. 8. 17. 07:05
 

 

 
 
 

 

패배를 껴안고|존 다우어 지음|최은석 옮김|민음사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나가고 2주일여가 지난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戰艦) 미주리호 선상. 맥아더 연합국 총사령관을 비롯한 9개국 연합국 대표들이 일본의 공식 항복문서를 받아내기 위해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었고, 책상 건너편에는 한 무리의 일본 관리들이 독 안에 든 쥐처럼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의식(儀式)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우선 미주리호라는 배 자체가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고향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선상에는 두개의 성조기가 특별히 준비됐다. 하나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당시 백악관에서 휘날리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853년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이 이끌던 파우해튼호에 걸려 있던 31개의 별이 그려진 옛 성조기였다. 미주리호는 미국 자체였던 것이다.

반면 항복문서에 조인한 일본인 두명 중 한 사람은 일본 육군을 대표하는 우메즈 요시지로 장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시게미쓰는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의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었기 때문에 불편한 걸음걸이로 갑판 위를 걸어야 했다. 그것은 패전으로 불구가 된 일본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일본 그 자체인 천황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양쪽의 서명이 끝나자 1500여기의 미 해군 전투기와 400여기의 B-29 폭격기가 굉음을 내며 도쿄 하늘을 뒤덮었다.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 오른 일본 대표단(우측 상단)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 군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미국의 대표적 일본사 연구자인 존 다우어 교수(MIT대·71)가 1999년에 발표한 이 책은 1945년 8월부터 1952년까지 미국 점령하에서 패전국 일본이 재건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치밀하게 추적한 역작(力作)이다. 저자는 일본이 전전(戰前)의 국가체제에서 탈피하는 진정한 패전은 1945년이 아니라 1952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고 본다. 동시에 이 '7년'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이 책의 강점은 모든 것의 싹이 담겨 있는 이 중요한 시기를 미시·거시적으로 분해하고 다시 종합해 냈다는 데 있다. 각주만 100쪽에 이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일본인 연구자들도 쉽게 접하기 힘든 자료까지 샅샅이 찾아내 '군국주의 일소(一掃)와 민주화'라는 승자의 강요된 개혁을 패전으로 절망에 빠진 일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때로는 어떻게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며 전후 일본을 만들어냈는지를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사회에 만연된 절망과 냉소를 딛고 어떻게 희망의 싹을 만들어갔는지, 위로부터의 혁명이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막아냈는지, 그리고 '천황제 민주주의'라는 기형적 체제를 어떻게 헌법의 형태로 담아냈는지 등을 저널리즘 문체로 그려낸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폭탄과 소이탄이 갑자기 그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그 하늘에서 평화의 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 당시 일본의 유명 만화가 가토 에쓰로가 그린 만화의 한 설명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학술적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시의 각종 출판물과 문학·영화·음악 등을 총동원해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본 사람들의 내면까지 추적한다.

거시적 차원으로 눈을 돌린 저자는 맥아더가 펼친 농지 개혁, 노조 장려, 재벌 해체 등과 같은 일부 개혁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관료와 은행 등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일본 사회를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즉 점령군은 민주주의 진작을 위해 일본에 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관료주의를 진작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미온적 개혁이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 국가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엄격한 규제하에 놓인 무역과 외환 관리 시스템의 제도화'를 만들어내 신흥 중상주의 국가 일본을 탄생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이 한때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됐다. 역사에서 의도와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