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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인 척하면서 영토 빼앗은 영국 [허동현의 모던타임스] [20]

淸山에 2012. 8. 21. 07:01

 

 

 

 

 

[허동현의 모던타임스] [20]

 '신사'인 척하면서 영토 빼앗은 영국
허동현 경희대 교수·역사학

 

 

수교 130년을 맞아 다시 돌아보는 영국과의 지난 역사는 냉혹한 국제정치판에서 적과 동지의 구별이 무의미함을 일깨우는 거울로 다가선다. 오늘의 영국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운 우방이지만, 한 세기 전 '해가 지지 않는 제국(帝國)' 영국은 조선왕조를 돕지 않았다. 1882년 6월에 체결된 조·영 수호통상조약은 미국과 맺은 조약처럼 달콤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임오군란으로 중국군이 진주하고, 속국임을 명시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맺어지자 영국은 가면을 벗었다. 그때 영국은 중국보다 더한 '요람을 흔드는 손'이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 1885년 무렵 거문도 주민과 자리를 함께한 영국군. 병영공사에 동원된 섬사람들에게 후한 품삯을 지급하고 의술을 베푸는 친절함도 보였지만, 거문도 점령 자체가‘신사의 나라’라는 말에 걸맞지 않은 불법 행위였다.

 

1882년 11월 도쿄에서 영국공사 파크스를 만난 박영효는 조약 개정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타국의 부당한 간섭에 대한 중재를 규정한 조약 1조에 담긴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22세 박영효는 일본공사 경력만 18년이었던 노련한 외교관의 손에 놀아났다.

 

이듬해 개정된 조약에서 영국은 관세율을 절반으로 깎아 체약국들이 이를 균점하게 함으로써 조선을 재정파탄으로 몰아넣었다. 공사도 북경 주재공사가 겸임케 해 중국의 종주권 강화에 힘을 보탰다. 기대가 환멸로 바뀌자 조선 정부는 중국이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러시아에 희망을 걸었다. 1884년 7월 조·러 조약을 맺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에는 부동항을 미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인아책(引俄策)을 본격 추진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듬해 4월 15일 영흥만을 내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조·러 밀약설'을 역이용해 거문도를 점령했다. "개의 목을 졸라 입에 문 뼈다귀를 놓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인도 총독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극동함대의 기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850마일 떨어진 거문도는 러시아의 목줄을 죄는 선제공격용 기지였다. 그러나 개가 문 뼈다귀는 보름 전 러시아가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판데(Pandjeh)였지 영흥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목을 졸라 영국은 인도 무역에 타격을 줄 판데를 뱉어내고 중국 무역에 위협이 될 영흥만도 탐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일거양득의 실리를 챙겼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수혜자는 영국은 물론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은 중국이었다. 한 세기 전 "음모의 대양(大洋) 위에 표류"하던 우리의 생존을 도운 우방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