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만에 빛본 '몽금포 전투'의 노병들 문갑식 선임기자 이메일gsmoon@chosun.com
기록상 유일 대북 보복 작전 올해 처음 戰史에 실려 6·25 북침설 선전에 이용될까 지금까지 정부마저 쉬쉬해 생존 노병들 "훈장 탐 안 나, 그저 위로의 말 한마디면 돼"
(왼쪽)공정식 사령관, 고 손원일 총장.
1949년 8월 17일 새벽 6시쯤 황해도 용연군 몽금포(夢金浦)에 검은 물체가 접근했다. 전날 새벽 2시 인천항을 떠난 대한민국 해군 함정 5척이었다. 여명(黎明) 속에 해변이 윤곽을 드러내자 특공대원 20명이 고무보트 5척에 나눠타고 항구로 돌격했다.
놀란 북한군이 반격했다. 해안초소와 부두에 정박한 함정에서 총탄이 빗발쳤다. 적탄(敵彈)이 특공대장 함명수 소령(87·전 해군참모총장)의 양쪽 넓적다리를 관통했다. 뭍 근처까지 온 고무보트 중 4대가 기관 고장으로 멈췄다. 전멸될 위기였다.
상황을 목격한 JMS-302 통영함장 공정식 소령(88·전 해병대사령관)이 중기관총을 난사하며 함 소령의 보트를 향해 돌진했다. 함 소령을 구한 뒤 302함은 37밀리 대전차포를 난사하며 앞으로 나갔다. 적이 주춤대는 사이 북 경비정 4척이 대파됐다.
302함(180t)승조원들은 육박전을 벌여 북한군 5명을 생포하고 35t급 제18호 경비정까지 나포해 남하했다. 몽금포는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퍼부은 북한 장산곶 포대 바로 위쪽에 있는 군항이다.
몽금포 전투는 한국 전사상(戰史上) 유일하게 가해진 대북 보복 공격이다. 참전자는 특공대원을 포함해 200여명으로 당시 1명만 부상을 입었다. 현재 생존자는 15명. 당시 우리 해군 전체 병력은 3000여명으로, 그 15분의 1 이 출전한 것이다.
이 혁혁한 전공(戰功)이 63년 만에 빛을 봤다. 참전자들의 구전(口傳)과 몇 권 안 되는 회고록을 통해 전해지던 내용이 지난 6월 해군본부가 펴낸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수록된 것이다.
공식 기록에 등재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가 있다.
"1948년부터 1년간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군내 좌익(左翼)이 함정 4척을 납북했고, 9척을 또 납북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정장(艇長)이 살해된 적도 있었죠." 몽금포 전투 참전자 중 최고령인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몽금포 작전’에 참전한 한국 해군의 JMS-302. 소해정(掃海艇)으로 해방 직후인 1946년 우리 해군에 인도된 180t급 함정이다. /해군 제공
해군뿐 아니었다. 육군 8연대 예하 2개 대대 병력 전체가 북으로 가기도 했다. 이렇게 뒤숭숭한 상황에서 군은 충격적 사건을 맞는다. 1949년 8월 10일 인천항에 정박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납북된 것이다. 엿새 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던 관함식(觀艦式)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북한이 대담한 선제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이태영 첩보부대장은 북으로 끌려간 보트가 몽금포에 계류된 사실을 밝혀냈다.
경무대 대책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이응준 육군참모총장,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앞에 두고 개탄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동해에선 태극기 단 함정, 서해에선 성조기를 단 보트가 올라가니…." 당시 손 총장을 보좌했던 정보감 함명수 소령이 회의 후 응징 작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작전 후 군은 곤욕을 치렀다. 미국이 무초 대사를 통해 '해군의 38선 월북작전'에 항의하고, 김일성이 나중 "6·25전쟁 발원이 몽금포작전"이라며 선전·선동전을 편 것이다. 이 주장에 중국·소련이 가세하며 북침설이 나돌았으나 1990년대 초 러시아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침설은 존립 근거를 잃었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몽금포 작전을 인정하는 데 20년 이상을 허비하다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의 '결단'으로 전사에 싣게 된 것이다.
공정식 장군은 "생존 노병들은 '양철훈장'조차 탐내지 않는다"며 "다만 지금이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이 전투 참전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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