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무초 대사의 6.25 證言

淸山에 2012. 6. 24. 13:04

 

 

 

 

 

무초 대사의 6.25 證言 
  
趙甲濟    

 


 
 6.25가 터졌을 때 주한미국 대사는 존 J 무초였다. 1950년 6월25일 새벽 8시 그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났다. 副대사인 에베레트 프란시스 드럼라이트였다. “미 군사고문단이 새벽에 38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대사를 깨우지 않은 것은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한 뒤에 보고하려고 한 것입니다”


  무초는 걸어서 5분 거리인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은 반도호텔에 있었다. 도중에 UPI의 빌 제임스 기자를 만났다.
 
  “대사님 아침부터 어디를 가십니까?”
  “38선에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한데 챙겨보시오”
 
  제임스 기자는 이 말을 듣고 제1報를 날렸다. 세계적인 특종이었다.
 
  무초 대사는 오전 9시에 “북한군의 全面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워싱턴의 국무부로 보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도 전달하도록 했다. 무초 대사는 서울에 주재하는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도 戰況을 알려주었다. 이날 무초 대사는 경무대로 자주 들어가 李承晩 대통령에게 최신정보들을 알려주었다. 李 대통령도 여러 통로로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무초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그때 미군은 약500명의 군사고문단을 한국군의 여러 부대에 파견해놓고 있었다.


  오후에 경무대로 들어가니 李承晩 대통령 옆에 申性模 국방장관이 있었다. 李 대통령이 “방금 국무회의가 열렸다”고 말했다.


  “내가 공산군에게 붙들리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거야. 내가 먼저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무초 대사는 말렸다.


  “한국군은 劣勢(열세)에서도 지금 잘 싸우고 있습니다. 밀리고 있으나 부대 단위로 항복한 곳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각하께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戰線의 부대가 알게 되면 사기가 떨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내가 잡혀선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 시간쯤 설득하다가 지친 무초 대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고 한다.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6월26일 오후 경무대에 올라간 무초 대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위해 두 대의 기동차를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다. 李 대통령은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내려갔다. 무초 대사에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초는 대단히 화가 났고 李 대통령은 미안해 했다. 무초 대사는 李 대통령의 오스트리아人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李 대통령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무초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들르세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무초 대사가 李 대통령을 찾아가 한 시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이 대통령은 생각하고 있던 話頭(화두)를 꺼냈다. 무초는 자연스럽게 對話에 참여하여 조언할 수 있었다.
 
  1971년 1월과 2월에 은퇴중이던 무초 대사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肉聲증언’에 응하여 위의 秘話를 소개했던 것이다. 무초 대사는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李承晩 정부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국민들이 통일을 환영하고 있다면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미국과 유엔의 개입근거를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초 대사는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戰線의 暴雨(폭우)가 한국을 구했다”고 말했다. 릿지웨이 장군 등 미군측의 회고에는 한국군의 무능과 무책임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한국사정을 잘 아는 무초는 동정적이다. 단기간에 건설된 한국군은 미국이 무기를 제대로 대주지 않았는 데도 잘 싸웠고, 이것이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도 재미 있다.


  '李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高次元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 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그는 제퍼슨類의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 부인(注: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國軍이 기습을 받고 死鬪하던 그날로부터 62년이 지난 날이다. 국군은 建國의 초석, 護國의 干城(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國軍은 앞으로 자유통일을 武力的으로 뒷받침해야 하고, 애국심과 절도가 있는 一流시민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
 
  국민皆兵制(개병제)에 따라 건강한 남성이면 모두가 군대에 들어가서 총을 잡고 2년 간 근무함으로써 애국심을 體得(체득)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축복이고 特權이다. 세계가 부러워 하는 제도이다. 이 국민皆兵制는 통일 후까지도 이어가야 한다. 국군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해야 할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