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로포트킨묘. 1921년 크로포트킨의 장례식이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아나키스트들이 합법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2 크로포트킨의 운구 행렬 중에 유명한 여성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가운데)도 있다. [사진가 권태균]
아나키즘 연구가 다니엘 게렝은 ?아나키즘?에서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시스트의 관계를 ‘형제이자 적’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형제지만 좌파 전체주의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적이다. 일제는 물론 좌파 전체주의와도 치열하게 싸운 존재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1920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서울시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스무 명 정도가 모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시인 김억(金億)이 가르치는 에스페란토(Esperanto)어 강좌였다. 강좌를 마친 이들은 30일 시내 장춘관에서 모임을 갖고 ‘조선 에스페란토 협회’를 결성했는데 회두(會頭)로는 김억, 부회두로는 이병조(李秉祚)를 선출했다. 이 무렵 국내에는 에스페란토어에 큰 관심이 일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24일자에는 투고생(投稿生)이 쓴 ‘청년 제군에게, 에스페란토를 권(勸)함’이란 글이 실렸다. 그는 “에스페란토는 일명 세계공통어라 칭하는 것이요……그 조직이 극히 간명(簡明)하고 그 문법이 극히 단순해 서양 어학(語學) 중 한 개 언어를 조금만 이해(少解)하는 사람은 4~5일 내에 학습할 수 있는 것이외다”라고 말하고 있다.
에스페란토어는 1887년 유대인 안과의사 자멘호프(Zamenhof: 1859~1917)가 창안한 국제어다. 자멘호프는 제정 러시아의 비아리시토크(Bialystok: 현재는 폴란드령)에서 출생했는데 이곳은 러시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 등이 어울려 살던 다민족 사회였다. 그의 모국어는 부친의 언어인 러시아어였지만 모친의 언어였던 유대계 이디쉬어(Yiddish)도 유창했고 폴란드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친이 독일어 교사였던 자멘호프는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영어를 익혔고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리투아니아어에도 흥미를 가졌다. 자멘호프는 각 민족 사이의 언어 불통을 해소하는 것이 여러 민족 사이의 평화를 가져오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생각에서 다양한 언어 실력을 기반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창안했는데, 1910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어가 현재 국제 공용어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 것은 제국(帝國) 미국의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결과지만 에스페란토어는 모든 국가, 모든 민족이 동등하다는 철학에서 나온 국제 공용어였다. 그런데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는 에스페란토어를 아나키즘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전 세계 아나키스트들은 에스페란토어로 서로 소통했던 것이다. 1902년 도쿄대생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 1877~1954)가 근세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에서 아나키즘(Anarchism)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서 아나키즘은 동아시아에서 ‘무질서, 혼돈’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 받아왔다.
아나키즘은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말로서 ‘없다(an)’와 ‘지배자(arche)’라는 뜻의 합성인데, 글자 그대로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각 개인, 각 지방, 각 조직이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 속에서 서로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아니다. 아나키즘이 억압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이론적 배경은 러시아 크로포트킨(Kropotkin: 1842~1921)이 주창한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에 있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 진화의 한 요인(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에서 서로 돕고 의존했던 생물종들은 진화에서 살아남았고, 서로 협력하지 않고 돕지 않는 종은 도태되고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던 두 사상이 영국 스펜서(Spencer: 1820~1903)의 사회진화론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해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정치철학이 되었다. 반면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피압박 개인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정치철학이 되었다. 국제노동절(International Workers’ Day: 메이데이)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8시간 노동제 쟁취 총파업에서 비롯된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노동자들은 헤이마켓(Haymarket) 광장에 모여 대규모 항의시위를 전개했는데, 시위 도중 폭탄이 터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다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경찰은 이 시위를 조직한 아나키스트 8명을 경찰 살해 교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7년 후 사건 조작이 드러나면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일리노이 주지사 게르드는 구금되었던 3명을 특별사면했지만 아나키스트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등 4명은 1887년 11월 이미 교수형을 당했고, 한 명은 그 전날 자살한 후였다.
아돌프 피셔는 “아나키스트라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지만 사회주의자라고 반드시 아나키스트는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양자를 가르는 기준은 좌익 전체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에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던 바쿠닌이 ‘과도적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마르크스처럼 총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상식과 역사적 경험에 어긋나는 사설(邪說)이다”라고 비판한 것처럼 아나키즘은 우익은 물론 좌익 전체주의도 강하게 비판했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론은 좋지만…”이라고 말하지만 아나키즘은 공산주의 이론 내에 전체주의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사상이다.
바쿠닌은 1870년대에 “(극도로 과격한 혁명가에게) 러시아 인민 전체 위에 군림할 왕좌를 주거나 독재권을 줘 보라…1년도 못 가서 그는 차르(황제)보다 더 악독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스탈린 집권 50~60년 전에 이미 좌파 전체주의 출현을 예견했다.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다가 서유럽으로 망명했던 볼린(Volin)이 “정치권력은 불가피하게 관료적 강제기구를 만들어낸다…(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일종의 새로운 귀족·지도자·관료·군인·경찰관·여당…을 산출한다”고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좌파 전체주의에 인민들이 극도의 고통을 겪었던 러시아나 중국, 그리고 지금의 북한 현실을 예견한 것이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국내에서 실력양성론이란 민족 개량주의 노선으로 나타난다. 이에 한계를 느낀 재일 유학생들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결성된 조선고학생동우회(苦學生同友會)는 아나키즘 색채가 짙은 단체였다. 1921년 10월 김약수·박열·김사국 등이 조직한 ‘흑도회(黑濤會)’도 아나키즘 색깔인 흑색(黑色)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나키즘 조직이었지만 결성 직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김약수 등과 노선갈등을 겪다가 박열·정태성·홍진후 등이 따로 흑우회(黑友會)를 결성했다. 흑우회 기관지가 강한 조선인(太い朝鮮人)인데, 강한(太い: 후토이)의 발음이 불령(不逞: 후테이)과 비슷했다는 이유니 실제 명칭은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이었다.(새 사상이 들어오다②사상단체의 등장 참조)
1920년 4월 서울 황금정(을지로) 광무대(光武臺)에서 발족한 조선노동공제회는 선언에서 “만일 우리 인류가 진정한 평화세계와 복지사회를 동경하고 원구(願求)한다면 정복민족과 피정복민족이 없는 세계, 특권계급과 노예계급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고로 약소민족은 강대민족으로부터, 천자(賤者)는 귀자(貴者)로부터, 빈자(貧者)는 부자로부터 각각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 강령 중에 “각종 노예의 해방과 상호 부조를 기(期)함”이라는 내용도 있어서 조선노동공제회도 아나키즘에 경도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총독부와 일경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아나키즘 조직이었다. 직접행동을 주창하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30일자는 청주경찰서 고등계가 교사 신○○를 연행해 취조 후 비밀리에 경성 경찰서로 보냈는데 ‘사건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쳐서 알 수 없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흑기연맹(黑旗聯盟) 사건과 맥을 통한 혐의’라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의 예심(豫審) 종결 전문(全文)에 따르면 1925년 4월께 서울 낙원동 수문사(修文社)에서 조직한 흑기연맹은 “일본의 현재 정치 및 경제 제도 변혁(變革)을 목적으로 한 무정부주의자 결사조직”이라고 전하고 있다.
흑기연맹은 조직 결성 혐의로 이창식(李昌植), 서상경(徐相庚), 홍진유(洪鎭裕) 등 9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 중 서상경·홍진유는 재일 아나키스트 박열(朴烈) 등이 1923년 4월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그해 10월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서상경·홍진유는 예심에서 석방되자 귀국해 이창식·신영우(申榮雨)·서정기(徐廷夔)·한병희(韓昞熙)·이복원(李復遠) 등과 흑기연맹을 결성했던 것이다. 흑기연맹은 비록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일경의 검거로 와해되었지만 이는 국내에 직접행동을 주창하는 아나키즘 조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