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문화·예술의 나라이기 이전에 전통적인 과학기술 강국이다. 세계 최초로 사진을 발명한 인물도 프랑스인 니세포르 니에프스다.
밀폐된 방의 한쪽 벽에 구멍을 뚫으면 바깥 경치의 영상이 반대편 벽에 거꾸로 맺힌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중국 철학자 묵자(墨子·기원전 470년께~391년께)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이 원리를 알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16세기 이전부터 이 원리를 그림 그리는 데 활용했다. 한쪽에 렌즈, 다른 쪽에 거울을 붙인 ‘카메라오브스쿠라(camera obscura)’라는 나무 상자를 만들어 그림 스케치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어두운 방’이라는 뜻인 카메라오브스쿠라는 카메라의 어원이다. 카메라의 조상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새로운 영상을 평면에 비추었을 뿐이다. 카메라오브스쿠라의 광학 원리에 화학 원리를 합쳐 최초의 영구적인 사진을 찍은 이는 프랑스 사람 니세포르 니에프스(Nic<00E9>phore Ni<00E9>pce·1765~1833)다. 발명가인 니에프스는 사진술뿐만 아니라 최초의 내연기관을 발명했으며 초기 형태의 자전거 발전에도 일조했다.
'연구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1826, 1827년)
니에프스가 태어난 가정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왕실의 법률고문이었으며 어머니도 유명한 법률가 집안 출신이었다. 니에프스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1780~1788년 앙제(Angers)에 있는 오라토리오 수도회에서 공부했다. 그리스어, 라틴어, 신학뿐만 아니라 물리, 화학을 공부했다. 당시로서는 실험 방법을 비롯해 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니에프스는 수도회에서 교수직에 올랐으나 성직을 포기했다.
사제·군인의 길 가다 발명가로
수도회에서 공부할 때 니에프스는 이름을 조제프에서 니세포르로 바꿨다. 니세포르는 성 니케포루스 1세(758년께~829)를 본받기 위해 선택한 이름이었다. 성 니케포루스 1세는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자, 역사가였는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806~815)를 지내기도 했다. 총대주교로서 그는 성상 파괴를 주장하는 황제와 싸웠다. 니케포루스는 ‘승리를 가져다 주는 자’라는 뜻이다. 성상(聖像)은 ‘성스러운 이미지’다. 대표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사진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발명한 것은 절묘한 우연의 일치다.
수도회를 나온 니에프스는 1788년 국민군에 입대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다. 1792년 귀국한 니에프스는 나폴레옹 군대에서 참모 장교로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했다. 군인도 그가 갈 길이 아니었다. 1794년 건강 악화로 퇴역한 그는 니스의 행정관으로 부임했다. 아녜스 로메로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공직은 1796년 그만뒀는데 이유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니에프스는 1801년 고향 샬롱쉬르손에 정착해 남은 생애 동안 발명에 매진했다. 그는 사탕무를 재배해 설탕을 생산하는 농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이 발명에만 몰두해도 될 정도로 그의 가산은 넉넉했다.
니에프스는 28세였던 1793년부터 형 클로드(1763~1828)와 함께 사진 발명에 착수했다. 온 가족이 1797년 사르데냐를 여행할 때 사진 발명에 대한 구상이 싹텄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니에프스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발명품은 사진이 아니었다. 1807년 니에프스는 형 클로드와 함께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을 발명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10년 기한의 특허도 얻었다. 니에프스는 내연기관에 ‘피레올로포르(Pyr<00E9>olophor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어에서 불 바람 나는 생산한다를 뜻하는 단어들을 조합한 단어였다. 피레올로포르는 오늘날의 가솔린 엔진과 마찬가지로 피스톤과 실린더로 작동했다. 이 내연기관을 장착한 2m 길이 보트는 손(Sa<00F4>ne)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성공했고 니에프스는 발명가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불행히도 내연기관은 니에프스 형제에게 재앙이었다. 연료로 사용한 석송(石松) 가루가 너무 비싸 상용화 가능성이 낮았다. 특허 기한의 만료가 다가왔지만 프랑스에서는 투자자를 찾을 수 없었다. 1817년 클로드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도 절망뿐이었다. 클로드는 형제의 가산을 탕진하고 반쯤 실성한 상태로 사망했다.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던 니에프스는 1813년 당시 유행하던 석판화(石版畵, lithography)로 눈을 돌렸다. 석판화는 물과 기름이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이용한 인쇄기법이다. 적당한 석판을 현지에서 구할 수 없는 데다 석판화 연구를 도와주던 아들 이시도르(1805~68)가 1814년 군에 입대하자 니에프스는 자연으로부터 영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니에프스는 카메라오브스쿠라에 주목했다. 직접 제작한 카메라 벽에 은염(銀鹽·silver salt)으로 코팅한 흰 종이를 부착했다. 1816년 희미한 비둘기집 영상을 종이에 맺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색이 바래면서 이미지는 이내 사라졌다.
대안이 있었다. 니에프스는 일종의 아스팔트인 유대 역청(bitumen of Judea)도 빛에 민감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대 이집트 때부터 사용된 유대 역청은 사해 지역에서 생산됐다. 1822년 60세의 니에프스는 교황 비오 7세의 판화를 유대 역청으로 코팅한 유리판에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소실됐다.
형 클로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유리판을 금속판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니에프스가 사용한 금속판은 일종의 주석합금(朱錫合金)인 백랍(白蠟, pewter)으로 만든 것이었다. 니에프스는 백랍 금속판을 카메라에 장착했다. 이전과 달리 직접 제작한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전문 카메라를 구입했다. 카메라에는 파리의 광학기계상인 샤를 슈발리에에게 산 렌즈를 달았다. 8시간의 노출(露出, exposure) 후에 금속판을 라벤더 기름으로 세척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니에프스는 작업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을 찍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사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1826년 혹은 1827년 여름이었다.
사진을 ‘태양이 그린 그림’이라 불러
니에프스는 자신이 발명한 사진에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 heliographie)’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양화(太陽畵)’라는 뜻이다. ‘연구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View from the Study Window)’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작품에는 비둘기집, 헛간 지붕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사진은 1898년 런던에서 개최된 사진전시회에 나타났다 종적을 감췄다. 반세기 동안 사라졌다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1952년 런던에서다. 사진의 역사에서 잊혀졌던 인물인 니에프스는 사진의 재출현으로 ‘최초의 사진가’ ‘사진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1963년부터 이 사진은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해리 랜섬 인문연구센터에 가면 볼 수 있다.)
당시 유럽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사진 개발 경쟁이 치열했다. 파리에 사는 루이-자크-망데 다게르(1787~1851)라는 사람이 니에프스의 성과에 대해 알게 됐다. 다게르는 세관 관리, 오페라 무대 배경을 그리는 화가로도 일한 바 있는 발명가였다. 다게르는 연구에 대해 문의하며 힘을 합치자는 편지를 니에프스에게 보냈다. 아이디어를 빼앗길까 두려웠던 니에프스는 애매한 답변을 보냈다. 다게르는 조르고 또 졸랐다. 마침내 1827년 니에프스는 형 클로드를 만나러 런던에 가는 길에 다게르를 파리에서 만났다. 확답은 주지 않았다.
영국으로 건너간 니에프스는 사진을 영국 과학자들에게 보여줬다. 조지 4세가 사는 윈저 궁전에도 사진을 보냈다. 5개월 동안 발명 홍보에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마침 다게르에게서 편지가 또 왔다. 니에프스는 1828년 프랑스로 귀국할 때 영국 체류 중 신세 진 영국왕립학회 회원 프랜시스 바우어에게 ‘연구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을 선사했다.
귀국한 니에프스는 1829년 다게르와 10년간 합작하고 수입을 반분하기로 합의했다. 둘은 따로 연구했다. 보안을 위해 둘은 암호를 사용했다. 예컨대 13번은 카메라오브스쿠라, 56번은 태양, 5번은 유대 역청을 의미했다.
별다른 연구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니에프스는 68세 나이로 1833년 사망했다. 발작이 사망 원인이었다. 다게르는 니에프스의 아들 이시도르와 작업을 계속했다. 노출 시간을 20~30분으로 줄이고 2분으로 또 줄였다. 다게르는 최초의 ‘실용적 사진’인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은판사진)를 1839년 발표했다.
다게레오타이프는 다른 사진 기술이 나오기까지 20여 년 동안 군림하며 19세기 중반에 초상 사진 붐을 이끌었다. 1840년 에드거 앨런 포(1809~1849)가 “사진은 근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승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다게르가 모든 공로를 독차지한 것은 아니다. 1839년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뿐만 아니라 니에프스의 아들 이시도르에게도 연금을 수여했다.
세계 최초의 사진 자리를 다투는 또 다른 사진 역시 니에프스의 1825년 작품이다. 사진에는 말을 끌고 가는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17세기 네덜란드 판화를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2002년 세상에 나와 62만5000달러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팔렸다. 경매는 소더비의 파리 지점에서 진행했는데 판매가가 비교적 낮은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이 사진을 국보로 지정해 국외 유출을 사전에 막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찍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수 사진 연구가들은 이 사진을 ‘제1호 사진’으로 인정하기를 꺼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