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김현희 조작설'을 조작한 사람들 박은주 문화부장 이메일zeen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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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에 불 지른 2003년 PD수첩, 객관적 증거 무시 '무조건 가짜다' 거주지 노출하고 국정원 '이민가라'… 北 위한 거였다면 이건 나라도 아냐 박은주 문화부장 TV조선의 '시사토크 판' 방송이 끝난 19일 밤 11시가 넘어, 기자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김현희가 말하는 그 PD수첩에 나도 출연했었다. 1987년 KAL기 폭파 사건을 취재했던 나는 제작팀에 이렇게 얘기했다. '(사건 취재 당시) 처음엔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김현희는 (유럽의) 거쳐왔던 장소, 묵었던 호텔의 호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수사를 할 수 있나 의심했다. 그러나 취재를 거듭하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게다가 아무리 독재정권 시절이었지만 기자가 다 죽었나. 이상했으면 기사 한 줄 못 쓰겠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조작이 아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방송에는 '이러저러한 정황 때문에 나도 의심했다' 이렇게만 나왔다.
결국 내가 '김현희는 가짜'라고 하는 데 일조한 것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건 2003년 11월 18일 방송된 PD수첩 '16년간의 의혹, KAL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편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KAL기 폭파 사건을 취재한 당시 한국일보 기자 C씨였다. "소송을 할까 했지만, 같은 언론인끼리 소송하는 것도 뭣 해서 참았다. 그 후로 나는 좌파언론과 안 만난다." 방송 취재에 응했던 2003년 11월, C씨의 직함은 통신사인 뉴시스 사장이었다. 언론사 사장의 발언까지 정반대로 왜곡할 수 있는 언론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지난 18·19일 이틀간 TV조선 '판'에 출연한 김현희씨에게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진행을 맡은 기자가 긴장을 풀 겸 농담을 던졌으나 그는 결코 웃지 않았다. 그 굳은 표정에 대한 의문은 인터뷰를 하면서 풀렸다.
'KAL기 폭파 사건이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한 음모였다' '미모의 폭파범이라니 혹 조작 아니냐' 같은 음모론은 당시 간간이 들렸던 소문이다. 그저 큰 사건에 따라붙는 음모론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3년 MBC PD수첩은 작정하고 이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조총련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일본 저널리스트가 쓴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책이 근거였다. 음모론자들은 여러 번 조서를 쓰면서 바로잡힌 내용들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가짜다'를 반복했다.
'PD수첩' 카메라는 김현희의 거주지를 노출하고, 인터폰을 눌러댔다. 북한이 마음만 먹는다면 김현희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놀란 김현희는 방송이 나온 날, 젖먹이 아이 둘을 데리고 야반도주했다. 방송 출연을 강권하던 국정원은 계속 그녀를 압박했다. 숨어 사는 집 앞에 낯모르는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국정원에서는 이민도 권했다. "의혹이 불거지니 도망갔다"고 할 셈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냥 방송 출연해서 내가 진범이라 말하지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김현희는 "작정하고 거짓말하는 방송에 왜 출연하느냐"고 했다. 하긴 언론사 사장 발언마저 180도로 뒤집는 방송에서 김현희가 어떤 주장을 폈어도 결론은 한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중동근로자 상당수가 포함된 115명의 희생자를 낸 엄청난 사건의 주범이 호강하고 사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김현희에 대한 괴롭힘이 '정의'의 심판이 아니라, 북한을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더 많은 지원을 주기 위한 '걸림돌 제거 작전'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정부가 나서서 직접 주도했다면, 이건 나라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 그리고 그를 부추긴 종북주의자들만큼이나 잘못하고 있는 건 지금 정부다. 그런 일에 가담했던 국정원 직원이 징계받았다는 소식도, 그들이 사과했다는 얘기도 아직 없다. 매일 나라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김현희가 나라를 비판했다. 그 비판이 타당하다는 게 이 나라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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