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대표적 레퍼토리인 이번 작품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의 원작인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안무가 존 노마이어는 1840년대의 파리 문화를 표현할 수 있는 쇼팽의 음악(피아노 소나타 제 3번 b단조 Op.58 , 발라드 제1번 g단조 Op.23등)을 사용해 남녀의 심리를 시시각각 담아냈다.
극중 마르그리트가 자주 관람하는 공연 ‘마농’ 속에 등장하는 인물인 마농과 데 그리외는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의 심리를 대변한다. 특히, 망령처럼 떠도는 마농의 이미지는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돈과 사랑을 모두 탐하는 비극의 여주인공 마농은 1막과 3막에 걸쳐 두 번 등장하는데 이는 작품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강효정과 에반 멕키가 분한 마농과 데 그리외는 주역들의 심리를 밀도 있게 뒷받침하며 안정감 있는 연기와 기술을 선보였다.
‘까멜리아 레이디’의 압권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사랑의 행각이 아찔하게 그려지는 2막의 ‘화이트 파드되’와 오해와 엇갈린 운명 앞에서 강수진이 이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3막의 ‘블랙 파드되’이다.
폐결핵으로 쓸쓸히 죽어가기 전 얼굴에 빨갛게 분칠을 한 채 마지막으로 공연장 나들이를 하는 마르그리트의 서글픈 눈빛과 발걸음은 아련한 기억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했다. 마르그리트가 마농과 데 그리외와 더불어 삼인무를 추는 꿈 속 장면에서 정점을 찍었다. 사랑의 희열과 슬픔, 비켜갈 수 없는 운명 앞에 선 여인 역으론 강수진 만큼 적격인 무용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르망으로 분한 마레인 라데마케르는 시원한 점프와 스킬, 감정연기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12/06/19/20120619021069_0.jpg)
국립현대무용단 '호시탐탐'
■ 국립현대무용단의 ‘호시탐탐’
지난 17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린 국립현대무용단의 ‘호시탐탐’은 고급 일식집의 코스요리처럼 보다 친절하고 부담없이 관객에게 다가온 1부와 메인 메뉴로 깔끔하게 차려낸 2부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게 했다. “티켓 값 2만원 손해본다 치고 한번 와서 오면 그 10배의 값어치를 느끼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홍승엽 예술감독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1부가 나무판과 까마귀등의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2부는 오롯이 신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1부 '라쇼몽―어쩔 수 없다면'은 첼로의 선율에 따라 복면을 쓴 채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동작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움직임에 따라 관객들의 머릿 속이 한껏 달아오르거나 이완되는 경험 역시 색다르게 다가왔다. 마지막 상대의 옷을 벗겨내고 밀쳐내는 연쇄적인 움직임 속에 담아낸 위트있는 아이디어와 생각거리들도 기분 좋은 경험을 안겨줬다. 이렇게 관객들의 입꼬리가 슬슬 끌어올려지며 1부가 마무리 됐다.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12/06/19/20120619021068_0.jpg)
국립현대무용단 '호시탐탐'
2부 '냅다, 호랑이 콧등을 걷어찼다'는 순수한 영혼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과 ‘명상’의 과정을 그렸다. 발레에서 볼 수 있는 발·팔 동작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영혼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신선하게 창조됐다. 가야금 선율 속에서 부처님의 구도가 그려지기도 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발을 내딘 누군가를 끌어내고 있는 듯한 인상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연꽃이 활짝 피어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 정갈하고 순수한 세계로의 초대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용수 개개인의 밀도 있는 움직임이 관객의 눈과 정신을 함께 자극했다는 점에서 현대 무용에 대해 잊고 있었던 설레임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2012 한팩 ‘솔로이스트’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 한팩 ‘솔로이스트’ 두 번째 무대는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12/06/19/20120619021067_0.jpg)
한팩 '솔로이스트' 무용수 최진욱
르네마그리트의 ‘도플갱어’를 모티브로 한 최진욱 (안무가 김윤수)의 ‘이몽’은 거대한 초록색 조명으로 먼저 관객들을 압도했다. 초반 음악없이 추는 춤과 대조되기도 했는데, 이는 홀로 있을 때의 개인과 거대한 세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의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초록 조명에 안개를 덧입히자 마치 마블링된 초록 물감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탄생한 초록색의 새로운 공간 밑으로 무용수는 사라졌다. 끊임없이 자신의 본 모습을 억누르는 장면, 상대 탓을 하는 장면, 바닥으로 침작해 들어갔다 상승하는 장면등 두 명의 자아가 등장해 상충하는 내면을 효과적인 움직임으로 전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예효승 (안무가 알랭 플라텔)의 ‘발자국’은 초연 공연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점이 인상 깊다. 여전히 온 몸으로, 특히 등으로 울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에 가슴이 흔들린 건 사실이나 다시 한번 관람하고 나니 서브 텍스트들에 대한 이해도가 더 충만해졌다. 말이 되지 못한 말,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못한 흔적들, 지금의 나를 형성하게 한 쓰라린 기억들이 무용수의 몸짓 속에서 한올 한올 살아났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내려온 마이크를 타격한 후 터져나오는 엄청난 굉음의 충격은 한 남자가 만들어낸 ‘발자국’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이은경(안무가 피터 암프, 로버트 스테인)의 ‘나쁘지 않은 기억들’은 부재하는 주위의 것들과 대면하는 의식으로 채웠다.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들과의 연결고리를 살피고 질문을 던진 이번 작품은 무용이 시작되기 전 무용수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가슴으로 떠나보낸 강아지와의 추억, 제일 잘 통하는 친구와의 느낌, 3년 전 돌아가신 삼촌과의 대면등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이었다. 각각 장면에서 필요한 소품들을 무대에 늘어놓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감을 키우게 한 점도 특이했다. 결국 이은경이란 사람의 인생역정이 다채롭게 펼쳐진 무용으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솔직한 무용수의 내면을 짧은 시간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 ‘나쁘지 않는 무용’으로 기억에 남을 듯 하다.
공연칼럼니스트 정다훈(ekgns4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