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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통일왕 諡號(시호)가 文武王인가?

淸山에 2012. 6. 17. 19:11

 

 

 

 

 

왜 통일왕 諡號(시호)가 文武王인가? 
 
 
 文武兼全(문무겸전)은 온전한 人格과 국가형성의 필수 조건이다. 
趙甲濟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에 보낸 年賀狀(연하장)은 이런 漢文章(한문장)이었다.
 
  筆力兵力必爲正義(필력병력필위정의)
  用之卽無敵不畏(용지즉무적불외)
 
  筆力(필력)과 兵力(병력)은 반드시 正義(정의)를 이룬다.
  이를 쓰면 겁이 없어져 천하無敵이다.
 
 北의 반역집단과 대결하는 데 언론인과 軍人(군인)들이 참고로 할 만한 글이다. 정보화 사회에선 글을 아는 이들은 모두가 기자이다. 이념전쟁에선 筆力이 兵力이라는 建國 대통령의 지적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곳이 한국이다. 휴전선은 兵力으로 지키고 후방의 이념戰線은 筆力으로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 대포를 많이 쏘듯이.
 
 政訓이란 말도 李承晩이 지었다. 북한군은 이념무장한 黨軍이므로 국군도 정치훈련이 되어 있어야 맞설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교육부서로서 政訓局을 창설한 것이다. 金寬鎭 국방장관은 軍의 政訓교육을 강화, "從北은 국군의 主敵"이라 가르친다. 筆力으로 대표되는 文과 兵力으로 대표되는 武를 합쳐야 자유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韓民族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王의 諡號(시호)도 文武王이다. 文武兼全(문무겸전)은 온전한 人格과 국가형성의 필수 조건이다. 
 
 

 

 

 

文武旺의 겸허한 유언
趙甲濟


三國史記에 적혀 있는 통일대왕 文武王의 유언은 권력자의 유언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담담하다. 죽음을 맞아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담백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前略) 山谷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北山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主(조조)의 西陵에는 오직 銅雀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機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만다. 草童 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갓 자재를 낭비하여 虛事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헛되이 人力만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은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庫門의 바깥뜰에서 인도의 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服의 輕重은 규정이 있으나 喪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의 鎭守와 州, 縣의 과세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 官員은 곧 시행하라.>

문무왕의 인감됨을 느끼게 해주는 이 유언은 천하大亂의 시대에 태어나 山戰水戰을 다 거친 대인물의 폭과 깊이를 드러낸다. 바로 이 文武王이 모든 것을 걸고 對唐결전을 선택하여 唐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함으로써 한반도를 韓民族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한 분이다. 50대에 죽은 문무왕 金法敏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 재를 바다에 뿌리게 한 것은, 지금 권력을 잡았다고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는 불나비 같은 인사들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이 아닌가. 민족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無常의 겸허함! 5년짜리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전통과 人倫과 예절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덤비고 있는 인간들이 生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 2004-10-07, 00:34 ]


 

 

 

민족의 행운: 金春秋, 文武王, 李承晩, 朴正熙


建國과 통일의 네 주인공은 一流국가를 見聞한 경험을 살린 自主的 개방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趙甲濟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두 가지 대사건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이로 인한 民族의 탄생이고, 대한민국 建國에 의한 국민의 탄생이다. 국민은 민족이나 백성보다 더 進化한 존재 즉, 국가의 主權者이다. 국민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민족이라는 母胎에서 생겨난 개념이니 신라의 삼국통일아야말로 민족사 2000년의 최대 사건이다.

삼국통일을 주도한 신라의 태종무열왕(金春秋)과 文武王(金法敏), 그리고 대한민국의 建國과 근대화를 주도한 李承晩과 朴正熙의 공통점이 있다. 네 사람 모두 해외 경험을 가진 개방파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自主정신의 소유자였다. 개방과 자주는 實用정신으로 매개될 때 같은 뿌리를 이룬다.

金春秋는 왕이 되기 전에 고구려(642년), 일본(647년), 唐(648년)을 방문하여 최고 지도자들을 만나는, 목숨을 건 외교를 하였다. 당시에 바다를 건너는 것만도 위험한 여행인데, 敵陣으로 들어간 그였다. 그는 세 나라의 수도에 오래 머물면서 지도자들과 깊은 대화를 가졌다. 三國史記와 日本書記, 舊唐書엔 김춘추의 출중한 풍모가 일본과 唐의 지도층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적혀 있다.

김춘추는 이런 대화와 見聞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일본, 고구려, 唐의 지도부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그들의 장단점과 戰略전술,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예술 및 제도에 대한 배움도 컸으리라. 특히 당시 세계최대 도시인 唐의 長安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그 후 新羅의 내부 개혁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김춘추가 도착한 서기 648년의 長安은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였다. 唐의 전성기를 연 태종이 즉위한 지 22년, '정관의 治'로 불리는 태평聖代였다. 김춘추는 거대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장안으로 모여드는 외국인과 외국문물을 접하고 더 감탄하였을 것이다. 唐은 대외 개방적인 정책을 펴 장안엔 북방과 西域과 서양의 상품, 예술, 종교가 모여들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 접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장안에 적어도 여섯 달 이상 머물렀을 것이다. 그는 당 태종을 만나 羅唐동맹을 맺고 백제, 고구려를 치기로 약속한다. 삼국의 사신중 김춘추처럼 중국의 황제를 직접 만나 담판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신라뿐 아니라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頂上외교였다.

김춘추는, 중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한 사람인 唐太宗을 움직일 만한 人品과 교양의 소유자였다. 동양三國을 여행하면서 당대의 최고인물들과 오랜 대화를 나눈 경험이 그의 人格과 경륜으로 昇華되었을 것이다.

김춘추는 아들 세 사람, 즉 金法敏, 金仁問, 金文王까지 唐의 조정으로 파견하여 머물게 하였다. 宿衛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신라의 王族이 唐의 황제를 모신다는 명분으로 唐의 조정에 머물면서 선진된 문명을 배우고 동시에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했다.

西江大 총장인 李鍾旭 교수는 '春秋-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에서 이렇게 썼다.
<춘추의 세 아들이 당나라에 갔던 것은 또 다른 의미도 지닌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성은 국제도시로서 신라인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모습을 선보였다. 그것은 춘추 부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충격은 가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하여 춘추는 신라의 중국화, 즉 세계화를 구상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과 더불어 이를 실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은 당대 최고의 정치와 제도와 문화를 見聞함으로써 높은 識見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이런 實力이 삼국통일을 이끈 리더십이었다. 두 사람은 경력상 親唐派였으나 國益과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선 唐과의 전쟁도 불사하는 무서운 自主派였다. 진정한 自主정신은 북한식 폐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 같은 열린 정신에서 생긴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 羅唐동맹의 약속을 맺고 귀국한 후 중국의 年號, 衣冠을 채택한다. 좁게 보면 중국화이고, 요사이 말로 하면 세계화 개혁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주도하는 동양문명의 主流에 신라를 편승시킨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李承晩도 김춘추와 같은 국제적 교양인이었다. 그 또한 당대 최고의 문명을 뽐내는 미국의 워싱턴에 오래 머물면서 미국의 대통령 두 사람(시오도어 루스벨트, 윌슨)과 친교를 맺었다.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또한 김춘추처럼 국제적 감각을 자주정신으로 포장한 이였다.

그런 李承晩이 建國을 주도한 것은 대한민국의 운명과 進路를 세계의 先進主流 세력과 연결시킨 행운이었다. 김춘추처럼 위대한 국제적 교양인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세계의 흐름을 응시하면서 다진 경륜을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서 펼 수 있었다는 것이 민족의 행운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대한 인물이 그 위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역사적 찬스를 갖는다는 것은 기적이다.

이승만을 이은 朴正熙 또한 김춘추를 이은 文武王처럼 개방적 자주파였다. 그는 滿軍, 日軍, 한국군을 두루 경험하면서 군사文化를 익히고 만주에서 야망을, 일본에서 국가주의를, 미국에서는 민주적 제도운영의 기술을 배운 국제파였다. 그 또한 이승만처럼 이런 국제성을 자주적 관점에서 흡수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특히 큰 조직을 만들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건설적 지도력을 군대와 외국경험에서 배웠다.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가 경험한 唐, 미국, 일본은 當代의 선진국이었다. 반면에 연개소문, 의자왕, 김일성, 김정일은 기본적으로 국내파였다. 김일성의 외국경험은 전체주의 체제인 중국과 소련 정도였는데, 이는 先進된 생각이 아니라 後進的 생각을 심었을 것이다. 自虐的 역사관을 정책화하여 대한민국을 自滅로 몰고가려 하였던 노무현씨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 미국 여행을 한번도 하지 못하였던 이다. 인간은 어디서 무엇을 배고 배우느냐에 의하여 識見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우리가 韓民族이란 의식을 깔고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민족사의 두 쾌거는 신라의 삼국통일, 대한민국의 建國인데, 두 사건의 主役들이 모두 '세계적 한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인간만이 조국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

대한민국은 아직 김춘추, 문무왕, 이승만, 박정희를 깎아내리는 것을 業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을 지식인, 진보파로 대우하는 나라이다.
[ 2009-11-21, 1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