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훔쳤나' '끼워샀나' 팽팽한 입씨름 문화재보호법 위반 항소심
사라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7일 오후 2시 대구법원 1층 11호 법정.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과 관련한 문화재보호법 위반 항소심이 열렸다. 이날 법정엔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주요 증인 두 명이 출석했다. 증인들은 골동품 관련 업종에 종사하며 이 사건 핵심 관련자들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재판이 진행된 2시간 동안 판사와 변호사, 피고, 증인들은 진실을 두고 날 선 공방을 했다. 주먹다짐이라도 할 듯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고 긴장감이 법정을 휘감았다.
검사는 증인의 증언에 만족한 듯 굳이 끼어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 측은 피의자까지 적극적으로 가세하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소유권 두고 치열한 공방
증인들의 적극적인 증언과 재판장의 증언 유도로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실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해례본의 새로운 소유자와 국가 기증에 대한 뒷얘기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골동품 업자들 사이에서 ‘꿈의 책’이라고 불리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였다.
피의자 배모(49) 씨는 2008년 상주 성하동 조모(67) 씨의 골동품 가게에서 고서 두 상자를 사면서 이 해례본을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지난 2월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복역 중 항소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호인 측이 요구한 증인들은 피고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먼저 증언에 나선 증인은 “고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조 씨의 골동품 가게에서 그 책을 분명히 봤다. 가치가 있는 고서라고 판단해 사들이려 했지만 구입은 하지 못했다”며 “20만, 30만원 정도의 가격이 제시됐으면 성사됐겠지만 1천만원까지 요구하는 것을 봐서 조 씨가 중요한 서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알았다. 조 씨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도둑맞았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양측 모두 거짓말?
두 번째 증인의 입에선 더 솔깃하고 소유권이 다시 헷갈리는 발언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해례본의 소유주로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조 씨 역시 이것이 훈민정음 해례본인지 모르고 사들였고, 배 씨에게 넘어간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
그는 “배 씨가 조 씨로부터 해례본을 훔친 것은 아니다. 통상 골동품 업계에선 ‘끼워 먹기’라는 게 있다. 배 씨는 다른 고서를 사면서 끼워 샀고, 조 씨는 이 사실조차 몰랐다”며 “실제 나중에 조 씨가 이를 알고 오히려 ‘배 씨가 한 건 했네’ ‘내가 팔아줄 테니 한 번 보자’ ‘50대 50으로 나눠 먹자’는 제의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더 나아가 증인은 “조 씨, 배 씨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각각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조상 대대로 내려왔다’는 이들의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주장한 것.
그는 “조 씨는 경북에서 고서 대가로 알려져 있던 박모 씨와 살아생전 거래를 많이 했는데 박 씨가 고인이 된 뒤 박 씨 부인으로부터 몇 권의 고서를 사면서 10만원에 사들였고, 이것이 훈민정음 해례본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배 씨에게 비슷하게 넘어가게 된 것인 만큼 물려받았다는 두 명의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했다.
조 씨의 해례본 국가 기증과 관련해서도 “조 씨의 소유권이 인정돼 배 씨로부터 해례본을 받아내면 한 명의 골동품 업자가 구입하려고 했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배 씨가 숨긴 것으로 보이는 해례본의 종적이 사라지자 국가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재판은 재판장이 퇴장하는 배 씨를 향해 “피고인, 잘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하고 뼈 있는 말을 던지자 “뭘 말입니까” 하며 대꾸한 배 씨의 짧은 신경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실마리가 보일 듯하면서도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관련 다음 재판은 28일 오후 4시 30분 속행된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또 다른 판본.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 반포와 동시에 출간된 한문 해설서로, 2008년 7월 말 상주에서 발견돼 ‘상주본’이란 별칭을 얻었다. 세종이 직접 쓴 서문에 해설이 붙어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불린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 그동안 1940년 안동에서 발견돼 서울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간송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잠시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진 상주본은 경매시장에서 수백억원에 거래될 수 있고, 그 가치는 1조원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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