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패권을 꿈꾸는 중국에게 한반도는 늘 '목구멍'이었다

淸山에 2012. 6. 8. 18:33

 

 

 

 

 

[허동현의 모던타임스] [12]

 

 패권을 꿈꾸는 중국에게 한반도는 늘 '목구멍'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역사학

 

 


 조선을 좌지우지한 청년 원세개

 

 

조선에 들어오기 직전인 1882년 23세 때의 원세개. 그는 국왕 고종을 정신 나간 ‘혼군(昏君)’으로 몰아 폐위하려 할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미관말직 하급 장교에서 몸을 일으켜 황제의 자리를 넘본 근대 중국의 풍운아 원세개(袁世凱·1859~1916). 그의 입지전(立志傳)은 1882년 임오군란이 빌미를 준 청군의 조선 출병(出兵)에서 시작된다. 오장경(吳長慶)의 막료로 조선에 온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진압을 발판 삼아 출세가도에 올랐다.

 

정변이 수포로 돌아간 직후 고종이 부동항(不凍港)을 미끼로 러시아를 유인해 중국을 견제하는 비밀외교를 펼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해 러시아 극동함대의 태평양 진출을 막으려 했고, 중국과 일본도 두 달 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해 8월 원세개는 26세라는 새파란 나이에 고종의 국정운영을 감독하는 '감국(監國)'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에게 맡겨진 주 임무는 조선이 러시아나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윤치호가 훗날 청일전쟁 직후 "나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극악무도함을 너무도 증오하므로 다른 나라(일본)의 지배는 비교적 견딜만하다"고 일기에 적었을 정도로 원세개의 횡포는 극심했다. 'Resident General (통감)'이란 그의 영문 직함이 웅변하듯, 그가 좌지우지한 10년(1885~1894) 동안 조선은 중국의 반(半)식민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침략자로 본 것은 원세개를 '돈원(豚猿·돼지와 원숭이)'이라고 부른 윤치호 같은 개화파나 왕권을 제약받은 고종과 근왕 세력뿐이었다. 중국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한 민씨 척족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이나 임오군란 때 천진으로 끌려가 유폐되었던 대원군조차 중국을 보호자로 보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중국이 여전히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인 오늘,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 아래 중국이 저지른 악행이 묻혔던 한 세기 전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우며 6·25전쟁이 마치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것처럼 호도하는 중국에 대해 우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입을 다문다. 원세개에 대한 아픈 기억은 우리의 미몽을 일깨우는 일침(一鍼)이다. 그때 청나라나 패권을 꿈꾸는 지금의 중국에나 한반도는 목구멍 같은 전략적 요충이라는 사실은 같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