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장수 김두원의 소금 값 반환 투쟁
“구휼금 거부하며 일본공사에 변상 요구…평생 항일투쟁으로 이어가”
전봉관의 구한말 百景 ?
![이코노미스트](http://images.joins.com/ui_joins/news08/public/ico_a_economist.gif)
김두원은 원산을 거점으로 동해안 일대를 오가며 소금을 도매하는 거상(巨商)이었다. 1907년 천일염이 등장하기 이전 한국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모두 바닷물을 끓여서 얻은 자염(煮鹽)이었다. 손이 많이 가고, 연료비도 많이 들어 값이 몹시 비쌌다.
어지간한 자본 없이는 값비싼 소금을 도매로 취급할 수 없었다. 1899년 5월 김두원은 경상북도 장기군(포항) 모포로 내려가 객주 김쌍동의 집에 머물면서 가을 김장철에 내다 팔 소금을 매집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객줏집 창고는 1088섬 소금 가마니로 가득 찼다. 매입원가는 5191원이었지만, 김장철 원산에서 매도하면 1만원은 넉넉히 받을 수 있었다.
소금 매입을 끝낸 김두원은 원산으로 소금을 실어나를 배를 구했다. 때마침 포구에는 일본 배 한 척이 정박 중이었다. 시마네현에사는 기무라 형제의 배였다. 김두원이 소금 운송을 부탁하자 기무라 형제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김장철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원산에 소금을 싣고 가 봐야 보관하기만 번거로울 것 아니오. 지금 울릉도에는 때 아닌 고기 떼가 밀려들었는데, 소금이 없어서 잡은 고기를 썩힐 지경이오. 일단 울릉도에 내다 팔고 김장철까지 다시 소금을 사 모으면 2배 장사가 아니겠소.”
김두원은 기무라 형제의 배에 소금을 싣고 목적지를 변경해 울릉도로 떠났다.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고, 긴 항해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일본인이 훔쳤으니 일본 정부가 갚아라”
“아무래도 짐은 내일 아침 일찍 부려야 할 것 같소.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뭍에 내려가 쉬고, 내일 아침 배로 돌아오는 게 좋겠소.”
기무라 형제의 제안을 김두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김두원은 울릉도 주민의 집에서 지내고 이튿날 새벽 포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포구 어디에도 기무라 형제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김두원이 대박의 꿈에 젖어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동안 기무라 형제는 소금 1088섬을 싣고 망망대해로 유유히 사라진 것이었다.
울릉도에 때 아닌 고기 떼가 밀려들었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기무라 형제는 처음부터 김두원의 소금을 노리고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일본인의 꾐에 빠져 50평생 모은 재산을 하룻밤 사이에 도둑맞은 김두원은 기무라 형제의 행방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기무라 형제를 붙잡아서 소금 값을 돌려받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공사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외무대신 박제순은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시마네현 사법 당국이 조사한 결과 김두원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야시 공사는 대한제국 정부에 유감을 표하면서 “기무라 형제는 사법 처리돼 징역을 살고 있지만, 그들이 은닉한 재산은 발견할 수 없다. 상속인인 기무라 긴노스케는 실업자인 데다 너무 가난해 소금 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된다”고 회신했다. 김두원에게는 ‘구휼금’ 명목으로 몇 백원이 송금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김두원은 소금 값 5191원을 모두 받아야겠다며 구휼금의 수취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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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공사 폭행 사건
김두원은 일본 정부에 또다시 탄원서를 보내고 일본공사관 문을 두드리며 하야시 공사와 면담을 요청했다. 하야시 공사가 면담을 완강히 거부하자 김두원은 일본공사관 앞에서 목을 매달아 자결을 시도했다. 일본공사관 경호 순사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지만,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도둑맞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적반하장의 상황에 내몰린 것이었다. 일본인이 소금을 훔쳤다고, 일본 정부에 소금 값을 물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온당한 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두원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고, 그 빌미는 다름 아닌 일본인과 일본 정부가 제공했다.
김두원은 탄원서에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적시했다. “일본인이 배를 타고 충청남도 홍주군 장고도에 이르러 그곳 암초에 배가 부딪혀 파선된 적이 있었다. 일본인은 그 바윗돌의 주인이 대한제국 정부라 하여 배상금 3000원을 국고금에서 받아간 일이 있지 않으냐? 또한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일본인이 조선인과 싸우다가 자기가 매를 맞았다며 치료비로 5000원을 국고금에서 받아낸 일이 있지 않으냐? 더욱이 갑오년(1894) 이래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가 생기면 대한제국 정부에서 배상과 구휼을 요구해 받아갔지 않느냐?”
일본인은 자기가 한국인에게 손해를 입었다고 대한제국 정부에서 배상금을 받아갔으면서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입은 손해는 왜 일본 정부가 배상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뾰족한 반박 논리가 없는 일본 정부는 김두원에게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시도하며 문제를 무마하려 했다.
탄원서를 보내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두원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고관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해결을 도모했다. 1903년 김두원은 일본공사관 정문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는 하야시 공사를 만났다. 4년 동안 겪은 설움에 복받쳐 인력거를 붙잡고 소금 값을 돌려달라고 사정하면서 눈물까지 쏟았다.
하야시 공사는 못 들은 척 외면했고, 경호 순사들이 달려들어 완력으로 김두원을 제지했다. 김두원은 참았던 분노가 갑자기 끌어올라 순사를 뿌리치고 하야시가 타고 있던 인력거를 거칠게 밀쳤다.“네가 무슨 일본을 대표하는 공사냐? 너희 나라는 백성의 도둑질을 그렇게 다스리느냐? 그러고도 동양의 일등국가라고 자랑하느냐?”
항일투쟁으로 변질…탄원 지속
인력거는 쓰러졌고, 하야시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당시 하야시 공사의 위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드높았다. 김두원은 하야시를 폭행한 대가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뜻하지 않게 ‘항일운동’의 상징 인물로 떠올랐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경향신문’ 등 각 신문사들은 앞 다투어 그의 ‘의기’를 칭송했다.
을사늑약 직후 길에서 친일 대신 박제순과 한창수를 만났을 때 김두원은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지금 서울에 호랑이가 없거늘 무엇이 무서워 총칼을 찬 일본인 헌병과 순사를 앞뒤에 호위하고 다니느냐? 나라의 대신으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이 없고, 단지 기생과 풍악으로 허송하면서 공연히 몇 백원씩 월급만 축내느냐?”
10년 가까이 투쟁을 지속하는 동안 김두원은 이유 없이 구금되고, 절해고도로 유배되기를 거듭했다. 소금 값을 돌려받기 위해 얼마 남지 않는 그의 재산은 바닥났고, 가족들은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이 몇 원씩 구휼금을 보내 주기도 했고, 유길준 등 대신을 찾아가 돈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몇 백원 구휼금으로 합의를 시도하면 단호히 거부했다. ‘당당하게’ 받을 소금 값이 있는데, 구휼금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일병합 이후에도 김두원의 투쟁은 이어졌다. 일본 총리, 의회, 조선총독, 경시총감 등에게 매일같이 탄원서를 보냈고, 고관들을 쫓아다니며 소금 값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애원했다.
김두원은 71세가 된 1920년까지 탄원서 투쟁을 지속했다. 그해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탄원서에서 그는 일본 정부가 소금 값을 배상할 수 없으면 인천·진남포·군산 3개 항구의 소금 전매특허권이라도 달라고 요구했다. 그 후 김두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투쟁을 지속했을 것이고, 끝내 소금 값을 돌려받지 못했을 것이다. 김두원을 일컬어 ‘백절불굴의 항일 의지를 보여준 투사’라는 평가도 있지만, 김두원의 소금 값 반환 투쟁을 ‘항일투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국권을 상실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해서든 소금 값을 돌려받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의 탄원서는 비굴한 어조로 일관된다.
김두원은 ‘항일투쟁’의 상징이 아니라 개항 이후 일본이 한국에 얼마나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왔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자, 오늘날 한국에서 유행하는 ‘1인 시위’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 주도로 소금 대량생산
천일염의 탄생
자염은 암염이나 천일염에 비해 생산원가가 비쌌고, 염도도 낮았다. 생산량이 수요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은 매년 청국과 일본에서 막대한 양의 소금을 수입했다. 청국과 일본은 한국의 소금 시장을 놓고 오랫동안 각축을 벌였고, 7.5%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 밀수도 기승을 부렸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한국의 고질적인 소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국고 수입도 증대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바닷물을 햇볕에 말려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을 도입했다. 1907년 경기도 주안에 처음 천일염 염전이 설치된 이후 서해안 일대 자염 염전은 급속히 천일염 염전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1911년 450만 근에 불과하던 한국의 소금 생산량은 1914년 5000만 근, 1910년대 말에는 1억 근으로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천일염의 도입으로 소금 생산량이 늘어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자염이 염도가 높은 천일염으로 대체됨에 따라 한국 음식의 맛이 달라지는 문제를 낳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