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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루트 1만km] 8. 서역 가는 관문 - 투루판

淸山에 2009. 8. 16. 11:05

 

 

톈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실크로드가 톈산남로와 톈산북로로 나뉘는 지점에 위치한 고대도시 고창성. 20세기 들어 유물을 찾는 도굴꾼들에게 훼손된 유적지는 마차가 실어나르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투루판=조용철 기자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고창성 마부. 그의 손에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투루판 인근 농촌에서 만난 위구르족 어린이들.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비단길의 중심이었던 둔황을 떠나려니까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둔황 막고굴에는 우리 고대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됐던 막고굴 아닌가. 무엇보다 막고굴의 벽화에서 조우관(새 깃털장식 모자)을 쓴 고구려 남자의 초상을 보았을 땐 마치 고선지 장군을 만난 듯 기뻤다. 또 다른 벽화에선 한국의 악기인 장구를 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고, 통일신라시대 화랑을 그려 놓은 벽화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을 늦출 순 없었다. 이제 간쑤(甘肅)성의 둔황(敦煌)에서 신장(新疆)성 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吐魯番)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본격적인 서역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오후 9시50분 투루판행 열차에 올랐다. 창 밖은 아직도 훤한 대낮. 중국 전역이 베이징 시간을 중심으로 한 단일 시간대인 때문이다. 달리는 열차의 창 밖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황량한 사막만 보일 뿐이다.

젊은 시절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이 길을 처음 들어섰다. 이후 서역 정벌을 위해 수도 없이 말을 타고 넘나들었을 테다. 기차가 하미(哈密)를 통과한다. 하미 지역을 배경으로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 전쟁의 또 다른 면을 묘사한 작자미상의 시 한 수가 전해 오고 있다. 전쟁의 쓸쓸함이 배어 나오는 시다.



들리는 말에 국경 황하수(黃河戍)에서는

여러 해 동안 병사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데

텅 빈 규방을 비추는 애처로운 저 달아

우리 님 계신 막사 위 비춰

외로운 나의 마음을 전해다오



고선지와 동시대를 살았던 서량절도사 개가운에게 바친 노래로 알려져 있다. 황하수는 오늘날 하미에 설치됐던 당나라 병영의 명칭. 당나라 시대 하미 지역은 토번과 돌궐의 침입이 잦은 전방이었다. 전장으로 징집돼 간 남편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홀로 빈 방을 지키는 여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좋아서 하는 전쟁이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치렀던 전쟁, 그 전쟁의 승패를 떠나 고선지 루트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없는 영혼의 안녕을 빌고 싶다. 그들이 흘린 피가 제지술을 비롯한 동서 문물 교류의 기폭제가 되었던 사실이 그 영혼들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리라.

하미부터는 신장성 위구르자치구다. 당나라 때 하미의 지명은 이주(伊州). 시안(西安)에서 시작해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당나라의 비단길은 그 여정의 절반이 신장성자치구를 통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는 중국.인도.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여러 인종이 자연스럽게 뒤섞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는 그 동안 야금야금 스며든 한족 인구가 전체의 47%나 되고, 토박이 위구르인은 43%로 밀려났다.

위구르족들이 전통적으로 중국 중앙정부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화해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 때문이다. 위구르족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카자흐.키르기스.타타르족 등과 종교적 유대감이 돈독하다.

신장성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한 이는 터키인을 닮은 36세의 위구르족 아리무(阿里木)였다. 신장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그로부터 고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 일행은 무척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 시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카슈미르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기적적인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아리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이다. 그에게 고선지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느냐고 묻자, 대학에서 배웠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신장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지를 재차 물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선지를 알고 있을 겁니다." 이 같은 대답을 신장성자치구 위구르인을 통해 듣고 있자니 자랑스럽다기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작 고구려인의 후예인 우리가 고선지 장군에 대해 더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아리무의 안내를 따라 투루판 시가지에서 약 40㎞ 떨어진 고창(高昌)을 찾았다. 톈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실크로드가 톈산남로와 톈산북로로 나뉘는 지점에 고대 도시 고창성이 남아 있다. 고대 고창 지역은 서역의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였다. 20세기 들어 이곳을 찾은 영국인 탐험가 오렐 스타인 등이 '옛 유물을 가져오면 돈을 준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여, 당시 현지인들이 유물을 찾느라 성을 마구 훼파시켰던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고선지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당나라의 서역 통치 지휘부)의 군대가 주둔한 쿠차로 갈 때 지금의 투루판인 고창을 경유했을 것이다.

고선지가 간쑤성의 우웨이(武威)에서 투루판까지 갈 땐 말을 타도 한 달 이상 걸렸을 길이다. 고창은 서기 600년 께 당나라에 복속되면서 안서도호부의 치소(治所)를 두었던 곳. 그러다 당나라가 실크로드 경영에 본격 나서며 안서도호부의 치소는 더 서쪽인 쿠차로 옮겼다. 안서도호부의 주요 임무는 서역을 넘나드는 상인들의 안정적인 무역을 보호하며 실크로드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서방으로 통하는 관문인 이 일대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장악해야만 서방세계와의 무역에서 독점적인 이익을 계속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주도권을 다툰 서역 정벌의 역사 한복판에 고선지 장군이 서 있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