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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루트 1만km] 10. 험준한 산악, 서역 통로 : 우루무치~쿠얼러

淸山에 2009. 8. 16. 11:03

 

 

자원의 보고(寶庫) 신장성. 사막과 경작지 한가운데서 원유를 뽑아내는 시추시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우루무치에 도착한 이튿날 비가 내렸다. 잠시 짬을 내 중심가에 있는 국제 그랜드 바자르 (이슬람권 특유의 시장)를 찾았다. 이스탄불의 바자르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비가 내리는 데도 활기 찬 모습은 이스탄불 못지 않았다. 가게 주인의 대다수는 위구르인. 바자르를 찾은 세계 각국 여행객들의 시선을 끄는 상품은 단연 '호탄옥'(和田玉)이었다.

비단길이 형성되기 이전 이 일대엔 '옥석의 길'이 있었고, '초원의 길'이 있었고, '산맥의 길'이 있었다. 그 중 옥석의 길은 호탄옥이 있었기에 생겨난 말이다. 호탄옥은 타클라마칸 남쪽에 있는 호탄에서 생산되는 옥이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있지만, 호탄옥엔 티가 없기로 유명하다.

호탄의 당나라때 이름은 우전(于). 고선지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지역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부대를 지휘했던 곳이 바로 우전이다. 당시 고선지의 직함은 진수사(鎭守使.지방사령관).

호탄 혹은 우전은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지역에 속한다. 한때 강성한 불교국가였던 우전국의 영역이었다. 우전 진수사로 부임한 고선지의 가장 큰 임무는 토번(吐蕃)을 제압하는 것. 훗날 고선지가 당현종으로부터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받게 된 배경엔 우전 진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업적이 자리잡고 있다. 행영절도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다른 지역을 공격하거나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는 전적인 재량권을 가진 높은 관직이었다.

고선지가 통치했던 안서도호부는 한반도의 4배가 넘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그 치소가 있었던 쿠차의 재래시장. 마차와 트럭,오토바이가 뒤섞인 혼잡한 시장은 대다수 위구르인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조용철 기자



이제 우루무치에서 470㎞ 떨어진 쿠얼러(庫爾勒)를 향해 가야 한다. 톈산산맥 등성이를 세 번이나 넘어야 하는 험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일행이 통과하는 코스는 카라샤르(焉耆)~쿠얼러~쿠차(龜玆)~아커쑤(阿克蘇)~카스(喀什)를 거치는 비단길. 카라샤르는 고선지가 우전에 이어 두 번째로 진수사를 지낸 곳이다. 쿠차는 안서도호부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고선지의 연운보(連雲堡) 전투와 소발률국(小勃律國) 공격이 시작된 지역이다.

지난날 고선지가 지켰던 톈산산맥은 도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의 적막강산이다. 두 번째 고개로 접어들면서 시커먼 돌산이 연속해 펼쳐졌고, 날카롭게 각이 진 빗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하염없이 올랐다가 또 내려가야 하는 거리가 에누리 없는 100㎞에 이른다. 하미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놓치지 않고 줄곧 따라오고 있는 톈산산맥의 위용이 우리를 압도했다. 의젓하고 강건한 기백을 자랑하는가 하면, 번개가 내려친다 하여도 끄떡 않는 담대함과 우람함이 또한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방 공룡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원시성도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굽이굽이 돌아서 두 번째 등성이를 올랐을 때는 대평원이 우리들 시선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신장성(新疆省) 최대의 바이무르커 초원 일부도 눈에 들어왔다.

카라샤르.우전.쿠차.카스 등 4곳을 일러 흔히 '안서사진'(安西四鎭)이라고 한다. 당나라가 신장성 지역을 통치할 군사 지휘부를 설치한 곳이 바로 안서사진이었다.

쿠얼러 남쪽으로 공작하(孔雀河)가 흐르고 그 아래로 타클라마칸 사막이 동서로 길게 누워 있다. 험준한 산악지대이지만 당나라가 서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이곳의 안전은 당나라의 번영과 직결됐다. 이 일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토번은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다. 그리고 안서사진 일대를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던 토번을 정벌함으로써 당나라가 실크로드의 안정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고선지 장군이었다. 고선지가 통치했던 중앙아시아의 안서도호부 일대는 한반도의 4배가 넘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에서 서방으로 차.비단 등이 수출되었고, 반대로 서방의 문물과 종교가 중국으로 들어 왔다. 동서교섭이 활발하게 전개됨으로 말미암아 안서도후부 지역에는 번역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선지에 앞서 727년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신라 승려 혜초가 이 길을 따라 쿠차를 통과했었다. 수많은 불경을 번역한 현장법사도 이 길을 지났다. 그리고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 이후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제지술이 처음으로 서방에 전해진다.

쿠얼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쿠차로 직행하기 전에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접어 들었다. 쿠얼러 시가지를 벗어나자 도로 좌측으로 포도밭이 보였고, 우측으로 톈산산맥이 다시 험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자 바로 타림분지가 나왔다. 타림분지는 58만㎢의 거대한 분지로, 그 안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들어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크기는 38만㎢.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크다. 그런데 당현종 때 고선지 장군과 그의 명령을 따르는 척후병들이 일사분란하게 말을 타고 달리며 남방 토번의 활동을 정찰하고 견제하던 전장이었던 이곳도 현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순 없었다.

'타클라마칸'이란 이름에는 '보물이 가득하다''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미란고성.누란고성.미야고성 등 당나라 성들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모래에 파묻혀 사라지고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번성했던 고성들이 왜 사막에 파묻히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다.

그런데 유적지를 묻어버린 모래 속에서 그러나 오늘의 중국인들은 석유를 찾아냈고 지금은 그 원유를 나르기 위한 송유관이 끝간 데 없이 뻗어 있다. 또 이스라엘에서 들여온 기술로 녹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막 중앙에 놓인 도로 양편에 3m 간격으로 호스를 10개씩 설치해, 그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나무를 자라게 하는 프로젝트다. 호스의 행렬은 사막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