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고선지 루트 1만km] 11. 군사요충지 : 쿠차~카스

淸山에 2009. 8. 16. 11:02

 

 

톈산남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스. 당나라 땐 소륵으로 불렸던 카스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의 중심에 있으며 산업과 교통의 요충지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중요한 지점이다. 카스의 외곽 농촌 마을. 추수를 끝낸 농부 가족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쿠차 노성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빵을 굽는 위구르 가족.
이슬람 전통에 따라 얼굴을 가린 여인이 쿠차 시내를 걸어가고 있다. 조용철 기자
고선지 장군이 군인으로서의 기량을 최대로 발휘했던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지금 우리 일행이 향해가는 쿠차(庫車)다. 쿠차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본부가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안서도호부의 책임자로서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토번을 제압하면서 서방의 아랍세계까지 호령했던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쿠차까지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렸다. 쿠차에 당도해선 곧장 쑤바스(蘇巴什) 고성(古城)을 찾았다. 오늘날 쿠차에서 20여km 떨어진 곳에 쑤바스 고성이 있다. 쑤바스는 위구르 말로 '물의 원천'이란 뜻. 톈산(天山)산맥에서 발원한 쿠차허(庫車河)가 쑤바스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흘러간다. 이 고성에 안서도호부의 본진이 주둔해 있었다. 안서도호 고선지의 지휘본부도 쑤바스 고성이었다.

외성, 내성, 본성의 3중으로 구성된 성은 매우 견고해 보였다. 웅장한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외벽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애석하게도 쿠차성의 산기슭과 강변에 있던 옛날 집 대부분은 문화혁명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쿠차 일대를 답사하며 톈산산맥의 북쪽과 남쪽의 생활이 현저하게 다를 수밖에 없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오아시스 농업으로 개간된 쿠차 지역이 왜 당과 토번과 돌궐의 각축장이었는지 그 이유를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지형이었다.

고선지가 활약하던 당나라 때 이 지역은 북강(北疆.톈산산맥 북쪽의 신장성)과 남강(南疆)으로 생활상이 뚜렷하게 구분됐다. 북강은 유목민들의 생활터전이었으며, 남강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사가 행해졌다. 신장(新彊)성 남쪽에 위치한 토번이 남강 일대를 침범한 이유는 바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장악하면 신장 지역은 물론 당나라 장안까지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였던 것이다. 당나라 입장에서 보아도 쿠차는 타림분지를 장악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새였으며, 안서도호부에 주둔할 많은 군사의 식량을 손쉽게 조달하기 위해선 지휘본부를 이곳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현종은 고선지에 앞서 차례로 세 명의 절도사를 쿠차 지역에 임명해 토번 정벌을 명한 일이 있다. 절도사 전인완(田仁琬), 개가운(蓋嘉運), 부몽영찰(夫蒙靈察) 등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토번 제압에 실패했다. 잇따른 실패 후에 당현종이 선택한 카드가 바로 고선지 장군이었다. 행영(行營)절도사로 특별 임명된 고선지는 쿠차의 지리적 형세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마침내 토번 진압에 성공한다.

고선지가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쿠차성을 떠난 것은 747년 4월경이다. 행영절도사란 일종의 게릴라 부대장과 같은 고위직. 그가 지나는 지역에서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황제가 위임.부여한다는 특별 직책이다. 절도사직에 오른 적이 없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은 당현종이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를 보여준다. 고선지가 비록 고구려 유민 출신이긴 했지만, 그가 이미 우전과 언기 지역에서 진수사로 근무하며 토번을 물리쳤던 혁혁한 전공을 현종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누볐던 신장성의 비단길은 어느 길을 가든지 끝없이 광대하였고, 마치 바다처럼 광활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심한 추위와 살갗을 벗겨낼 것처럼 숨가쁜 더위, 살을 에는 풍찬노숙에 식량과 물은 언제나 부족했다. 끝간 데 없는 사막 위로 보이는 것은 회오리 바람과 하늘뿐이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없었고, 땅에는 향기 나는 풀 한 포기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지나는 오늘의 여정처럼, 가깝고 먼 곳을 막론하고 오직 모래 언덕일 뿐 방향을 가름할만한 어떤 지형지물도 없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지나며 노천에서 하룻밤 야영을 할 때는 이튿날 가야할 방향에 막대기 혹은 죽은 사람의 해골이나 뼈를 놓아두어야 했다. 어떤 때는 사막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악귀와 같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이 바람을 만나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선지가 갔던 바로 그 길을 따라 우리 일행은 쿠차를 출발해 아커쑤(阿克蘇)를 거쳐 카스(喀什)로 향했다. 카스의 당나라때 지명은 소륵(疏勒)으로 네개의 주요 군사 지휘부가 있던 안서사진(安西四鎭) 가운데 하나였다. 당나라 때 소륵은 오늘날 카스에서 남쪽으로 10여km 더 간 곳에 위치한다. 현재 그곳엔 중국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당나라 때도 주요 군사 기지였는데, 지금도 병영이 있다 하니 1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카스에서 30여km를 더 가면 쿤룬산맥과 톈산산맥이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고선지는 쿠차에서 카스를 지나 총령(嶺)→파밀천(播密川)→특륵만천(特勒滿川)→오식닉국(五識匿國)→연운보(連雲堡)로 진격하며 이 일대의 토번 세력을 격파했으며, 곧이어 다시 소발률국(小勃律國) 정복에 나서 마침내 토번 정벌의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아커쑤에서 카스로 향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톈산산맥이 끈질기게 우리 일행을 따라붙었다. 사막 속에 문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변경 마을의 삭막한 상가들은 뒷골목 없이 오직 한 줄로만 늘어서 있다. 땡전 한 푼 투자하지 않고 만든 서부활극 세트장 앞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카스가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멀리 쿤룬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카라샤르와 쿠차에서 카스까지 얼추 1300㎞ 이상을 달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 왔다해도 타림분지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타림분지는 그처럼 광활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2005.10.28 05:30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