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통이 안 되면 혈통이라도…"
다음날 새벽 4시 나는 다시 呑虛 스님의 방산굴로 올라갔다. 말이 새벽이지 칠흑 같은 밤이었다. 스님은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윗몸을 흔들흔들, 눈은 천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내가 책상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妄想(망상)을 내쫓고 있는 거여."
스님은 좌선을 방해하는 방문객을 맞았으나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난밤의 그 분위기, 인터뷰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사이의 연대감 비슷한 그런 것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요즘 중고등 학생들은 이런답니다. 공자가 3천 년 전에 태어나서 공자지, 지금 났으면 별볼일 없는 사람이지―아, 이런다는 거여. 그놈들 가르친 선생부터 불러 피가 나도록 볼기를 쳐야 해. 이 사회가 무식한데 학생들이 뭘 알겠어? 안다는 것이 도대체 메야? 석가도 말했지만 아는 것이 끊어진 그 자리가 도(道)자리여. 모르는 게 곧 아는 거야. 안다는 건 반대로 모른다는 것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성경에서 全知全能이란 말이 나오는데 모르기 때문에 전지전능할 수 있는 거에요. 아는 것이 끊어진 그 자리가 全知全能한 자립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 자리를 아는 사람이 바로 성현들이야. 凡人들은 배워야, 깨우쳐야 그 자리를 알고."
"스님은 몇 년 전에 위장병을 앓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화제를 스님의 신변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내가 돌비늘(雲母)을 장복했어요. 그 때문인지 동남아 여행하고 돌아온 뒤 배가 아파 서울의 큰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하는 거야. 암 같은데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겠다는 겁니다. 나는 안 된다고 그랬어. 아이들(필자 주 : 제자들을 가리킴)이 나를 데리고 다른 병원으로 가 다시 진찰을 받게 했는데 같은 진단 결과가 나왔어요. 아이들은 대책 회의를 열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나는 몸에 칼 못 댄다고 고집하고 그냥 지냈어. 그러다가 이젠 다 나은 모양이야, 괜찮아요."
남의 일같이 말한다.
"원고를 그렇게 쓰시고도 피로하지 않으세요?"
"피로하긴, 난 그런 데 신경 안 쓴다니까요.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종일 써 제키지. 누가 오면 그 사람하고 이야기하면서 한 손으로 글을 쓴 적도 있어. 그래도 문맥은 잘 되는데 실례가 될까 보아 요사이는 안 하지. 전에는 여대생 신도가 와서 교정도 보아주기도 했는데 요사이는 혼자 하지."
그러면서 원고를 보여 준다. 만년필로 내려 쓴 필체는 또박또박한 正字로 되어 있다.
"선생님의 전 부인은 생존해 계십니까?"
"몇 년 전에 떠났어요. 아내라기보다는 은인이지, 은인."
"은인이라니요?"
"아니, 여자 같아야 아내지. 남자보다 더 강해. 여자 맛이 안 나. 내가 그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漢學을. 그래서 恩人이라는 겁니다. 아니, 그냥 친구야, 친구."
"손자까지 보셨지요?"
"세 명이나 보았어. 내 아들은 농사군이여. 손자 녀석들이 공부를 못 해. 돼지 새끼를 낳았는지, 원(웃음). 아이는 팔십 퍼센트는 어머니를 닮아요. 씨도 잘 뿌려야 하지만 밭이 더 중요해요, 밭이."
스님은 한참 동안 자신의 가계(家系) 자랑을 했다. 아버지나 형제가 모두 자기보다 인물이 출중했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관상가는 어릴 때의 탄허 스님을 보고 비록 인물은 아버지보다 못 났을지 모르나 글은 아버지를 능가할 거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거푸집'만 보고 인간을 평가하는데 그 상학(相學)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스님은 신식 교육을 받지 않으셨죠?"
"학교 문턱에도 안 갔어. 四書三經과 周易 등 한문학을 했습니다. 수백 독 했어요. 줄줄 외웠습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책을 통째로 외워 댈 수 있어요. 한문 성경도 읽었어요."
"성경은 얼마나 읽었습니까?"
"성경은 단편적으로 공부했죠."
탄허 스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불교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려면 수재는 30년이 걸리고 둔재는 300 년이 걸릴 것이다. 도교는 20년, 유교는 10년이면 족하다. 기독교는 나 같은 둔재도 3년이면 터득할 수 있다. 재주군이라면 석 달이면 신구약을 다 욀 수 있다."
탄허 스님은 이야기 곳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곤 했다. 그 자랑의 표현 방법이 솔직했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자랑처럼 순진하게 느껴졌다.
"선생님의 붓글씨는 仙筆이란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몇 년 전 어느 보살이 나에게 와서 자꾸만 병풍에 글을 써 달라고 조릅디다. 나는 그런 글을 쓰기 싫어해. 그래서 안 써 주려고 여덟 폭 병풍을 만들어 오면 써 주겠다고 했어요. 아, 그런데 그 억척같은 보살이 백지 병풍을 만들어 가져 왔잖어. 쓸 수밖에. 병풍에 걸터앉아 써 내려갔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시간을 재어 보더니 8분 걸렸다고 그러더구먼."
"단숨에 썼는데도 한 자도 틀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한 자라도 틀리면 병풍을 못쓰게 되는 건데…"
탄허 스님을 20년 동안 모셨다는 월정사 부주지 김 삼보 스님에 따르면 탄허 스님은 치약을 사용하지 않고 늘 소금으로, 그리고 손가락으로 양치질을 한다고 한다. 식사는 小食주의이며 일반적인 사찰 풍습과는 달리 차를 좋아하지 않고 우유 같은 것을 즐겨한단다.
"차는 중국인의 체질에 맞아. 커피가 단백질 많이 섭취하는 서양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과 같이. 차는 기름기를 씻어 내거든. 우리야 단백질이나 기름기를 많이 먹지 않으니 몸을 갉아 내는 식품은 적당치 않습니다. 갉아 내는 것보다 보충하는 쪽의 음식이 좋아. 보신하려면 더운 걸 먹어야 해."
"더운 음식이 어떤 겁니까?"
"꼭 뜨거워야 더운 게 아녀. 오곡이 가장 더운 거야. 그러니 밥이 제일이지. 밥 잘 먹는 게 최고여. 덥기로는 산삼이 으뜸이지. 그걸 먹고 나면 마누라 하나 더 얻어야 돼. 그런데 산삼을 먹고 나서는 한 달 동안은 금욕을 해야 합니다. 북받치는 양기를 참기가 힘들겠지만 못 참았다간 몽땅 여자한테 가버려."
"더운 게 몸에 꼭 좋다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이 사람. 팔 다리 잘려나간 사람 보고 누가 송장이라 불러? 몸이 싸늘해져야 송장이지, 사지가 성해도. 대장경에서 불이 命의 뿌리라 했습니다. 남자도 陽氣 없으면 그게 시체지. 그래서 아내는 도망 갈 게고…".
그런데 탄허 스님은 요즘 밥맛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누룽지를 끓여 먹는다'고 했다. 같은 솥 밥을 계속 먹으니 맛이 없고 가끔 외식을 하면 식욕이 돌아오는데 '그게 바로 늙어 가는 증거다'고 말하며 웃었다. "누구든지 죽을 때는 굶어 죽는 거야."
이 탄허 스님의 말을 받아 얼마 전에 들어 와 배석하고 있던 한 여승이 '서서히 자연사하는 거지요'라고 했다.
"지역 감정의 해소 방안에 대해서…"
"그건 위정자에게 달렸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내일부터도 가능합니다. 지역 감정의 원소가 어디인가. 국초에 태조가 "대전통편"에다가 서북 사람 쓰지 말라고 한 것, 그것이 발단이란 말이요. 오죽했으면 이북 사람들이 500 년 원수는 三南 놈이라고 했겠어. 그 김구 선생도 늘 '성계란 놈'했단 말여. 위정자가 다른 道 사람 쓰면 자기 道 사람들도 그 위정자를 좋아하지, 미워하겠오?"
탄허 스님은 그런 건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 허, 그런 질문은 어폐가 있는데…허, 허."
그러나 탄허 스님은 거침이 말문을 열고 쏟아 붓기 시작했다.
"영국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약육강식이 그네들의 철학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평등을 외치는 마르크스가 나타났으니 優勝 劣敗의 사상이 살아 남겠어요? 그러나 공산주의는 평등을 구실로 人權을 희생시키는 모순을 저질렀어. 이게 그들의 단점이야. 자본주의 체제도 貧富 격차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면 양쪽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 열쇠는 동양 사상에 있는 거지요.
동양 사상은 원래 학문적으로는 종합학이요, 서양 사상은 분류학이여. 전체를 넓고 깊게 보고 아우르는 데는 무가 메라도 동양사상이야. 그 안에 정치가 들어 있는 거여. 정치란 건 잘 하면 얼마나 재미있는 건데? 어떤 지도자가 나타나면 민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까? 우선 그 지도자가 우리를 이롭게 할 것인가. 다음에는 그가 우리를 편하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가 우리를 올바로 제도해 줄 것인가. 이런 기대가 있는 거예요. 그 해답은 전부 동양 사상 안에 들어 있다니까요?"
탄허 스님은 2년 전 '80년대의 변화와 종교'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주 만물이 도덕에서 시작하고 도덕에서 종결 짓는다는 것이 동양 사상이다. 도의 사회는 종교가 중심이 되는 사회다. 도덕의 실천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니까. (중략) '80년대에는 반드시 그런 王道 정치가 세워질 것이다. 가령 어항 속에 담아 둔 고기에 물이 떨어질 때만 되면 한 바가지씩 부어 줌으로써 고기들이 계속 감사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정치를 끝맺음하고 넓은 강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누구의 덕으로 사는지 모를 세상이 이 '80년대에 펼쳐질 것이다. (중략) 왕도정치에 철학과 역사 의식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는 종교는 어차피 낡은 껍데기를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현재의 종교는 쓸어 없애야 할 것이다. 신앙인끼리 괄목 상대하고 네 종교, 내 종파가 옳다고 하며 원수시하는 천박한 종교의 벽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 장벽이 무너지면 超종교가 될 것이다. 김 일부 선생과 강 증산 선생도 儒佛仙이 합쳐져 그렇게 된다고 했는데 그 예언의 현대가 '80년대에 열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중략) 새싹이 나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썩어야 한다."
탄허 스님과의 대화는 두 시간 계속되었다. 앞날 밤과 합쳐 네 시간의 대화였다. 약간의 짓궂은 질문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대답해 주었다. 육중하게 보이는 자태에서 말은 물처럼 쉽게, 그리고 가볍게 나왔다. 나와 함께 있던 비디오 촬영 기사가 스님에게 심우도(소를 찾는 열 폭 병풍인데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역정을 비유한 그림)를 가리키는 포즈를 잡아 달라고 했더니 한 10분 동안 찬찬히 병풍 그림을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副주지 김 삼보 스님은 지난 밤 방산굴에서 우리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스님이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와서 인터뷰를 할 때는 뭣이 잘 안되어 우리가 민망했어요. 방송 기자가 스님 얼굴이 너무 굳습니다. 하며 좀 자연스런 표정을 요구하니까 원래 그런데 어쩌란 말이요 하면서 퉁명스레 말씀하시곤 했어요'하던 말이 생각났다. 새벽 6시쯤 女僧이 아침 공양을 들고 들어 왔다. 나는 자리를 뜨기 전 물었다.
"스님의 학문을 이어 받을 후계자가 없어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다 인연따라 가는 거지요. 법통이 없으면 혈통이라도 남겨야지…"
김 탄허 스님은 혈통을 남기는 데는 일단 성공한 상태다. 방산굴을 나서니 새벽의 기운이라고는 환한 僧房(승방)에서 울려 퍼지는 염불 소리뿐이었다. 그 불빛과 소리쪽으로 암흑을 헤치며 걸어 내려오는 나의 머리에 남는 한 마디 말은 '산불을 물 한 잔으로 끌 수 있습니까, 아직은 그게 탄허의 힘이요'였다. 탄허 스님의 법통까지도 이어진다면 그 한 잔 물이 동해물로 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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