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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版 ‘태극기 휘날리며’- 봄비, 60년 만에 만난 형제를 적시다

淸山에 2012. 4. 18. 10:57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版 ‘태극기 휘날리며’
 

동생 6·25참전 → 동생 찾아 입대한 兄전사 → 유품 갖고 귀국한 동생 “형 옆에 안장” 유언
 
아치볼드 허시 씨가 아내와 함께 형인 조지프 허시 씨의 사진을 보며 그리워하는 모습이 2003년 캐나다의 한 일간지에 실렸다. 국가보훈처 제공
 

동생을 찾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해 이국땅에 묻힌 형, 그리고 평생 형을 그리워하다 눈을 감은 노년의 동생…. 이들이 60여 년 만에 나란히 옆자리에 눕게 됐다.
 
 국가보훈처는 25일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묘지에서 6·25전쟁에 캐나다군으로 참전한 조지프 허시, 아치볼드 허시 형제의 합동안장식을 개최한다고 17일 밝혔다.
 
 형제의 애틋한 사연은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월 초 조지프 씨(당시 22세)는 다니던 철도회사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도로 관리자로 근무하다 4개월 먼저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한 동생 아치볼드 씨(당시 21세)가 걱정돼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혈육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형은 동생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같은 부대인 캐나다 제2보병대대에 지원해 한국 파병 길에 올랐다.
 
 
뉴스이미지[동영상] 심금 울리는 ‘형제애’PLAY
 

 하지만 형제는 전쟁 기간에 서로 만나지 못했다. 연일 공산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동생의 안부를 수소문하던 형은 1951년 10월 13일 치열한 전투 와중에 적탄을 어깨에 맞고 쓰러졌다. 출혈이 너무 심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제야 동생은 형의 참전과 부상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왔고, 형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짧지만 감격어린 재회를 했다. 동생은 형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형은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거뒀다.
 
 형의 유해는 1951년 10월 17일 유엔묘지에 안장됐고 동생은 귀국해 형의 마지막 유품인 잠옷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어머니는 장남의 ‘마지막 흔적’을 눈을 감는 날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동생도 해가 갈수록 형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25년간 폐질환으로 투병하던 아치볼드 씨는 지난해 6월 딸인 데비 허시 씨(41)에게 “내 유해를 한국에 잠든 형과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뒤 생을 마감했다.
 
 이후 딸은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사연을 접한 한인 출신 연아 마틴 캐나다 상원의원은 국가보훈처에 e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캐나다 현지 관련 단체들도 형제의 합동안장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섰다.
 
 
데비 씨는 22일 아들(16)과 함께 아버지의 유해를 갖고 보훈처의 초청으로 방한할 예정이다. 다른 참전용사들도 동행한다. 보훈처는 인천공항에서 데비 씨를 포함해 캐나다 참전용사와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해 봉영식을 한 뒤 25일 부산 유엔묘지에서 형제의 추모행사와 합동안장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유족에게 참전에 사의를 표하는 액자와 메달, 감사패를 증정할 계획이다.
 
 6·25전쟁 당시 캐나다군은 모두 2만6791명이 참전해 516명이 전사하고 30여 명이 실종됐으며 1200여 명이 부상했다.
 
 
윤상호 군사전문 기자 ysh1005@donga.com
 
 


 

 

"형, 온 줄도 몰랐는데… 죽지마, 죽지마요"

[오늘의 세상]

전현석 기자
이메일winwin@chosun.com


 

동생 따라 참전한 형 - 한국 온 동생은 몰랐다, 걱정하던 형이 따라 온 줄…
"너와 같은 이름의 사람 있어" 동생이 가보니 형은 피투성이… 눈물로 형을 한국에 묻었다

형 따라 묻히는 동생 - 형 그리며 살던 동생은 작년 "형 옆에 묻히고 싶다" 유언…


25일 부산 UN기념공원서 61년 만에 '형제 유해 상봉'
형은 6·25전쟁에 참전한 동생이 걱정돼 뒤따라 입대했다. 동생은 전장(戰場)을 헤매다 총상을 입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형과 뒤늦게 재회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이 아니다. 캐나다의 6·25 참전용사 조지프 허시(Joseph Hearsey)와

아치볼드(Archibald) 허시 형제의 실화(實話)다.

 

61년 전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된 형 조지프씨를 만나기 위해 동생 아치볼드씨의 유해가 오는 22일 한국에 온다. 형 곁에서 영면(永眠)에 들기 위해서다.

 

형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州)의 작은 마을 이그나스(Ignace)에서 태어났다. 조지프는 7남매 중 장남이었고, 아치볼드는 한 살 터울의 차남이었다. 동생은 21살 되던 1950년 9월 7일 6·25전쟁 참전을 위해 입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2002년 7월 동생 아치볼드 허시씨가 부인과 함께 6·25에 참전해 숨진 형 조지프 허시씨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왼쪽 큰 사진). 부산 UN기념공원에 있는 조지프 허시의 묘(오른쪽 위). 6·25 참전 당시 동생 아치볼드씨 모습(오른쪽 아래). /캐나다 일간지 'The Chronicle Journal' 제공

 

형 조지프는 동생이 걱정돼 다니던 철도 회사를 그만두고 1951년 1월 6일 입대해 한국 땅을 밟았다. 형은 동생이 있는 프린세스 패트리셔 경보병연대에 배치됐다. 영연방 27여단과 함께 작전을 펼쳐 여주 전투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둔 부대였다. 형제는 같은 연대에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 속에 만나지 못했다.

 

1951년 10월 13일 동생은 북한군과의 격렬한 교전 직후 참호 정비에 나섰다. 근처 참호에 있던 전우들이 "너와 이름이 같은 병사가 쓰러져 있어"라고 외쳤다. 그곳에 캐나다에 있을 줄 알았던 형 조지프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고꾸라져 있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던 형은 동생 품에서 곧 숨을 거뒀다. 동생은 형의 주검이 담요에 말린 채 다른 전사자 시신 옆에 놓이는 것을 지켜봤다. 아치볼드씨는 "그때야 형이 나를 보호하려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형은 1951년 10월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동생은 전쟁이 끝나자 형의 유일한 유품인 파란색 실크 파자마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형이 귀향할 때 어머니에게 주려고 사 놓았던 선물이었다.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파자마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고 한다.

 

아치볼드는 1955년 명예 제대를 했다. 부인 아그네스(Agnes)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전쟁으로 생긴 가슴 속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어둔 밤에 소리를 지르고, 숨진 형의 사진을 보며 우는 날이 많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게 된 것이다.

 

아치볼드의 외동딸 데비(Debbie)씨는 "아버지는 제가 성인이 된 뒤 6·25전쟁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며 "그때야 아버지 손이 왜 항상 검푸른 피멍 투성이였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아치볼드는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보호하려고 주먹질을 하는 꿈을 자주 꿨는데, 그때마다 깨어보면 침대 옆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치볼드는 형의 묘지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가난했다. 참전용사에게 한국 방문 기회를 주는 UN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폐질환에 걸려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뒤였다. 자기 대신 2009년 11월 방한한 딸이 찍어온 형의 묘 사진을 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랬다.

 

아치볼드는 작년 6월 25년간의 폐질환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형 옆에 함께 눕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딸 데비씨는 한인 출신 첫 캐나다 연방 상원 의원 연아 마틴(Yonah Martin·한국 이름 김연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캐나다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허시 형제의 합장을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섰다. 전사자의 부인만 합장을 허락했던 부산 UN기념공원 측은 캐나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형제의 사후(死後) 상봉을 받아들였다. 딸 데비씨는 22일 보훈처 초청으로 아버지 유해를 들고 한국을 찾는다. 허시 형제의 합장식은 25일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린다.

 

 

 

 

 


"형, 나 코리아에 왔어… 이제 형 옆에서 같이 쉴게요"
김진명 기자
이메일geumbori@chosun.com

 

 

 

캐나다판 태극기 휘날리며… 동생 유해 마침내 한국에
유골함 들고 온 딸 "60년 그리움 풀리길…"


22일 오후 4시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군(軍) 의장대가 나타났다. 어느 백인 노인의 흑백 영정사진을 안은 의장대원 뒤로 유골함을 든 외국인 여성이 들어섰다. 6·25 참전용사인 캐나다인 아치볼드 허시(Hearsey) 의 유해가 외동딸인 데비(Debbie)씨의 품에 안겨 한국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함께 6·25에 참전했다가 1951년 경기도 연천군 사미천 부근에서 전사해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된 형 조지프(Joseph)의 곁에 묻히기 위해서였다.

 

의장대가 늘어선 가운데 공항까지 마중 나간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태극기와 캐나다 국기로 유골함을 덮어줬다. 데비씨는 "마음속으로 '아빠, 드디어 한국에 왔어요'라고 했다"며 "이렇게 성대한 기념식을 열어줄 줄 몰랐다"고 말했다.

 

아치볼드는 1953년 캐나다로 귀국한 이후에도 항상 형이 묻힌 한국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데비씨를 낳으면서 생활에 쫓겨 한국에 올 돈을 모을 수 없었다.


 

 

 6·25전쟁에 캐나다군으로 함께 참전했다 전사한 형(조지프 허시)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던 동생 아치볼드 허시(영정 사진)씨의 유해가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그의 유해는 오는 25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있는 형의 묘소에 함께 묻힌다. 영정 사진 왼쪽은 아치볼드 허시씨의 손자, 그 옆은 딸 데비씨다. 데비씨는“아버지는 항상‘내가 한국을 위해 싸웠던 것은 옳은 일이었다’면서도 60년간 먼저간 형을 그리워 했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데비씨는 "조지프 삼촌과 아버지는 쌍둥이처럼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다"며 "캐나다 현충일인 11월 11일이 돌아오면 아버지가 늘 형 생각에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웠던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하시면서도

60년간 조지프 삼촌을 그리워했어요."

 

6·25 참전용사에게 한국 방문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아치볼드는 이미 폐질환이 심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딸 데비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2009년 한국에 와서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된 조지프 삼촌의 묘지를 찾았다. “캐나다로 돌아가서 아버지께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드렸어요.” 데비씨는 “아버지는 높이 솟은 마천루와 깔끔하게 정돈된 UN기념공원 모습에 놀라셨고 ‘나도 여기 묻히고 싶다’고 하셨다”고 했다.

 

작년 6월 아치볼드가 숨을 거두자 데비씨 가족은 유해를 화장해 반은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데비씨는 “반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합장을 하고, 반은 조지프 삼촌 곁으로 돌려보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2일 아치볼드의 유해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임시로 안치됐다.

 

데비씨는 오는 25일 아치볼드씨의 유해를 부산 UN기념공원에 가져가 형 조지프씨 옆에 묻을 예정이다. 데비씨는 “한국인들이 아버지와 삼촌의 희생과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봄비, 60년 만에 만난 형제를 적시다

부산=권경훈 기자
이메일werther@chosun.com

 

 

 
캐나다판 '태극기 휘날리며'

6·25 참전한 형제 딸·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산 UN 묘역에 나란히 묻혀
25일 오후 4시20분쯤 부산 남구 대연동 UN기념공원 캐나다군 묘역.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바람도 거셌다. "땅" "땅" "땅" 조총(弔銃) 소리가 잔뜩 흐린 하늘에 울렸다.
 
"아빠…" 캐나다에서 온 데비(Debbie·52)씨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캐나다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아치볼드 허시(Archibald Hearsey) 하사의 외동딸이다. 아치볼드는 형
조지프(Joseph) 옆에 있기 위해 수만리를 건너 이날 안장됐다.
 
우산을 받쳤지만 데비씨의 검은색 웃옷은 비에 축축이 젖었다. 소매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검은 색 샌들 속의 하얀 발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가로 세로 30㎝가량에 70㎝ 깊이로 파진 무덤에 아버지 아치볼드 하사의 유해함이
안치됐다.
 
데비씨는 "아빠와 영원히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너무 슬프지만 한국에 오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신 아빠가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6·25전쟁에 캐나다군으로 함께 참전했던 허시 형제가 60여년 만에 함께 영면(永眠)했다. 지난해 6월 생을 마감한 동생 아치볼드 허시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형 조지프 허시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25일 오후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서 아치볼드 허시의 딸 데비(가운데)와 손자 살로먼(왼쪽)이 참석한 가운데 합장식이 진행됐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그는 한동안 유해함 위로 차마 흙을 뿌리지 못했다. 옆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들
살로먼(Soloman·16)군이 대신 흙을 뿌렸다.
 
말총머리를 한 그는 할아버지가 입던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소매는 짧았고 엉덩이 쪽은 헐렁했다. 살로먼 군은 "할아버지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할아버지를 추억하기 위해 평소 즐겨 입으시던 양복을 일부러 입었다"고 말했다.
 
데비씨는 유해함을 감쌌던 흰 보자기를 손에 꼭 쥐었다. 아빠를 땅에 묻고 마음에 묻는 동안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데비씨는 "아버지는 6·25전쟁 경험담을 많이 들려 주셨는데 항상 마지막엔 먼저 전사한 큰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州) 작은 마을 이그나스(Ignace) 출신인 아버지 아치볼드가 먼저 한국전에 참전했고, 동생이 걱정된 형 조지프는 뒤따라 참전했다. 형은 1951년 10월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총탄을 맞았으며, 전장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의 품에 안겨 숨을 거뒀다.
 
데비씨는 "아버지가 '그때야 형이 나를 보호하려고 뒤늦게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되뇌곤 했다"고 말했다. 데비씨는 고통과 싸우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힘겨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데비씨는 "아버지는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구하려는 꿈을 자주 꿨고, 그때마다 침대 옆 탁자에 주먹질을 했다"며 "아버지의 손에 든 피멍도 당신의 마음속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데비씨는 "전례가 없는 형제 합장을 허락한 한국에 정말 감사한다"고 했다. UN기념공원에는 지금까지 전사자의 부인만 합장을 허락했다. 형제 합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시 형제의 사연을 국가보훈처에 알려온 한인 출신 첫 캐나다 상원 의원 연아 마틴(Yonah Martin·한국 이름 김연아)과 합장을 위해 현지에서 기금을 모아준 분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큰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무명용사들이 청춘과 목숨을 바쳐 지킨
한국이 잘사는 나라가 돼 있어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더욱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허시 형제 합장 안장식에는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 영연방 참전용사와 가족,
국군과 국가보훈처 관계자, 시민 등 200여 명이 함께 했다. 데비씨 모자(母子)는 26일
경기도 파주 적성에서 열리는 임진강전투 기념식에 참석하고,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만찬에 참석한 뒤 27일 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