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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석달… 발싸개가 필요해요"

淸山에 2012. 4. 14. 11:22

 


 

 

 

 

"입대 석달… 발싸개가 필요해요"

신용관 기자
이메일qq@chosun.com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잠자던 113통의 북한 편지사연 묶어
"피난가시오" "사랑의 결실 보자"… 6·25 당시 전선 넘나든 육성들
 
 


조선 인민군 우편함 4640호
이흥환 엮음| 삼인|352쪽|1만5000원

 

 

"아모쪼록 춘길과 춘덕을 죽이지 말고 길러주시우."

(평남 안주군에서 남편 정청송이 함북 명천군의 아내 박옥선 앞으로

1950년 10월 9일 보낸 편지)

 

"입대한 지가 어언간 3개월이 지나는 오늘까지 가내 제절의 신체 건강이 길이 보존되여 있습니까? 저는 입대한 그날부터 공화국의 군인답게 소속 보위 초소에서 용감성과 대담성을 발휘하고 있으니 안심하시요. 수치감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발싸게(2.3척) 양말(5.6꺼리) 춘추용 도리닝구(2매) 난닝구(2.3매) 상하의 내복(1벌) 장갑(한 꺼리) 약간의 금전."(평양 내무성의 2대대 통신소대 특무장이 된 아들 김준주가 평남 용강군의 아버지 앞으로 1950년 10월 15일에 보낸 '시급한' 부탁의 편지)

 

미국 메릴랜드주 국립문서보관소(NARA)에는 6·25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들이 보관돼 있다. 그중 문서 상자 1138번과 1139번 두 개에는 1950년 10월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평양중앙우체국이 미처 배달하지 못한 편지 728통과 엽서 344장 등 편지글이 모두 1068통 고스란히 남아있다. 워싱턴의 한 연구소에 머물고 있는 언론인이 이 가운데 113통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연합뉴스

 

 

북한 인민군과 그 가족이 쓴 편지엔 검열을 의식한 탓인지 '원쑤' '강도'라며 남한과 미국을 비난하는 구절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편지에서 전하려는 이야기는 생존이고, 사랑이다. 아내에게 세간에 미련 두지 말고 빨리 피난 떠나라 다그치고, 인민군이 된 아들이 전라도 고향의 어머니한테 소식도 못 드리고 입대해 죄송하다 울며, 폭격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 사망 소식을 놀라지 말라면서 함경도 누이에게 전한다. 평양의 관리가 중국 요동성의 애인에게, 모스크바의 아내가 평양의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전장에 핀 사랑 이야기도 있다. "내가 조국 강토에 와서 있을망정 나의 어머니를 모르거나 귀란이를 모르거나 있던 곳을 모르거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요. 1950년 6월 14일 애인 상홍 서." 조선인민군 우편함 제4640호의 '애인' 전상홍이 중화인민공화국 송강성 상지현 용궁구 조생촌의 장귀란 '동지' 앞으로 보낸 연서다. "어서 사랑의 결실을 보자"는

여성의 편지, "혼인 날 받아놓았다"는 아버지의 편지도 있다.

 

1차 사료(史料)로 평가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고, 생생한 육성이 담긴 훌륭한 '전쟁 문학'이다. 전자 게임처럼 전쟁이 현장 중계되고 있는 지금, 한반도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치른 분단국임을 처절히 깨닫게 만드는 책이다.

 

"오라버니 전상서. 옵빠(오빠)의 소식을 알지 못하여 이 누이 가슴은 쓰라리다 못하여 간장이 다 스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업쓴(없는) 사람은 업쓰나 산 사람은 사르야지요(살아야지요). 이 누이가 몬난 타스로(못난 탓으로) 언니를 죽여버렸습니다. 미리 피난시키었으면 안 죽을 사람을 죽였으니 분합니다. 아이들은 저한테 맡기시오. 죽지 않고 살았으면 나한테 오기를 원합니다."(평안북도 박천 서무리의 누이 류경희가 평양의 오빠 류경찬에게 1950년 10월 5일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