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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초반 청와대 신년하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필자(右)의 인사를 받고 있다. |
1970년이 다 저물어갈 때였다. 언론계 선배인 윤주영씨가 돌연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령났다. 경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그는 대사직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유유자적하며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일 욕심이 많고,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완수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이었다. 사람에 대한 욕심도 대단했다.
아마 그만한 욕심을 재물에 두었더라면 벌써 재벌의 반열에 올랐으련만 그렇지 않고 젊은 인재들을 자기 품안에 긁어 모으는 데만 열중했다. 주위에서는 국무총리나 집권당의 당 의장도 너끈히 해낼 수 있으리라 촉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되었으니 잉어가 물을 만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발령이 나고 며칠 뒤 윤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전에 자주 만나던 불고기 집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제야 축하인사를 드릴 기회가 왔구나 싶어서 나갔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항상 모이던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 혼자 나와 있었다.
윤 선배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봐, 나하고 같이 들어가세"라고 말했다.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야. 청와대지." 나는 사양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냐며 거절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내 속셈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언론계에 발을 디뎠으면 편집국장을 한번은 해보고 그만두어도 그만두어야지 중도하차할 수 있겠는가, 윤 선배는 젊은 나이에 편집국장을 다 끝내지 않았느냐, 나도 편집국장을 한번은 해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에게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우리집에 내려오는 유교(遺敎) 때문이다. 절대로 현직(顯職)에 오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켜야 한다. 우리집의 유교는 그냥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조선조의 당쟁사화가 극에 달했을 때 그 피해를 가장 극심하게 본 집안이 우리 가문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유교가 생겨난 것이다 등등의 얘기를 조용히 풀어놓았다.
윤 대변인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그러면 다른 친구 누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둘이서 진지한 마음으로 언론계의 동료와 선후배 가운데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그날은 그냥 헤어졌다. 속으로 난(難)은 일단 피했구나 싶었다.
이틀 후 다시 만났을 때 윤 대변인은 약간 느긋한 표정이었다. "이봐 김형, 비서실장이 당신을 잘 알고 있던데. 꼭 데려오래." 그러면서 계속 동행을 고집하고 나왔다. 그는 "대통령께서도 당신을 잘 알고 계시던데 어떻게 된 일이야. 이젠 별 도리없네. 같이 가세"라고 못을 박았다.
이렇게 해서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청와대의 공보비서관(1급)으로 발령(70년 12월 16일자)을 받고 말았다. 이로부터 만 9년 간에 걸친 나의 정치적 '외인부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 외인부대 생활에서 겪은 일 중에서 몇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들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