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0504/htm_2005041121071730003010-001.JPG) |
▶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右)이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예방을 받고 있다. |
1972년 5월 이후락 정보부장의 평양 잠행은 그해 7월에 발표된 7.4 남북 공동성명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 공동성명에 대해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 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후락씨 개인으로 보자면 평양 잠행은 그에게는 '종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 잠행에 여러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장이 평양 잠행을 결정한 과정에도 무리가 있었지만 김일성과의 면담도 비정상적이었다. 귀경이 예정된 5월 4일 새벽 자정이 지나자 이 부장은 갑자기 연락을 받았다.
북한 측은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그에게 그저 같이 가자고 했다. 밖은 칠흑같은 밤에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고 있었다.
덮어놓고 산길을 자동차로 달려가자 김일성이 있었다고 이 부장은 회고했다. 이 부장은 만약에 대비해 준비해간 청산가리를 제대로 주머니에 넣었는지도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일성을 만났으니 이 부장의 정신상태는 어떠하였을까. 더욱이 김일성이 너털웃음으로 팔을 벌려 껴안으며 "당신은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고 박 대통령을 습격한 사건(1.21 사태)에 대해 사죄까지 했으니…. 머리가 보통사람보다 몇 배 빨리 돌기로 소문난 이 부장이 공포와 불안 그리고 안도감의 변화 속에서 어떠한 꾀를 생각해 내었을까. 더욱이 그는 서울로 돌아갈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이때 오히려 우둔하다 싶을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이라면 서두를 것 없이 당초 목적대로 있는대로 보고 듣고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 부장의 입에서는 이상한 말이 나왔다. 박 대통령 생각과는 다른 외세배격론이다. 노회한 김일성은 이를 받아 "외세를 배격하자.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자"하면서 그들이 구두선처럼 되뇌던 이른바 통일 3원칙을 이 부장에게 받아먹였던 것이다. 이 부장은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의 국시인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을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끼리라면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문제삼지 말자"는 김일성의 말을 어떻게 그냥 꿀꺽 받아먹을 수 있었을까. 두려워서였을까.
이 부장의 평양 잠행에 대한 답방의 형식으로 72년 5월 29~31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 일행이 서울을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한다. 상비군을 줄이고 서로가 건설에 힘을 쏟는다면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스탈린 거리니 붉은 군대니 하는 말을 쓴다는 얘기를 듣고는 북한이 소련의 속국이 된 줄 알았다. 나도 여건이 성숙되면 김일성 주석과 만나겠지만 지금은 아직 그런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 불신의 해소같은,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지금 만나봤자 오히려 만나지 않았던 것보다 못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 말은 자기를 외세배격론자로 말한 이후락 부장의 말과 김일성 자신이 말하던 외세배격론의 허구성을 정면으로 반격한 것이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을 다시금 촉구한 것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