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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1월 30일 남북조절위 남측 위원장인 이후락 정보부장(左)이 조절위 3차 회의를 위해 서울을 방문한 북측 위원장 박성철 부수상을 만나고 있다. |
1972년 7월 4일 남북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과 분단 후 최초의 고위급 회담인 남북조절위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직접 이 성명을 발표한 이후락 정보부장은 일약 뉴스메이커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에게 마냥 요란하게 터지는 플래시의 불빛처럼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 달 전 이 부장은 평양에서 돌아온 즉시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해 북한 잠행에 관해 보고했는데 핵심은 7.4 공동성명의 문안이었다. 박 대통령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마디로 문안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평화통일을 읊은 것은 좋으나 북한의 인민회의가 공식적으로 채택해 놓은 평화통일 3대 원칙을 그대로 받아쓴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언짢아 했다.
이 부장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잠행했던 것의 성과인 데다가 미.중 화해 등 세계적 긴장완화 추세에 부합되는 것이라는 명분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착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남북대화의 목적이 전쟁 재발의 방지인 이상 굳이 정치문제로까지 판을 단숨에 벌일 필요는 없었으며, 먼저 인도주의적 접촉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박 대통령은 7.4 성명이 발표된 후 즉시 청와대 공보비서실에 학계.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지식층의 반응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조사해보니 북한의 평화통일 3대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앞으로 한국의 안보에 근간이 되는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 불가피하게 연계될 것이기 때문에 크게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리고 남북조절위원회라는 명칭 자체가 북쪽에서 사용하는 용어일 뿐 아니라 그 기능이 모호하여 자칫 잘못하면 권력구조상의 옥상옥이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부장은 세계 어느 나라 비밀정보기관의 장과 달리 정치 일선에 얼굴을 드러낸 '제2인자'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 부장을 부르는 호칭이 조절위원장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의 행동범위도 종전의 정보부장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앙정보부라는 기구와 그 주위 인물들이 그렇게 만들어 가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정부의 선택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긴장완화의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기는 했다. 그런데 남북 간 적십자회담만으로는 불충분했을까. 전쟁 재발의 예방 차원이라면 '인도주의적 접촉과 대화'가 가장 무난한 초기 시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왜 굳이 정치협상이라는 길을 열어놓은 조절위원회라는 생소한 명칭의 기구까지 발족시켜야 했을까. 그 남쪽 대표를 정보부장이 겸직한다는 것은 권력의 분산을 원칙으로 하는 정부조직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게 아닌가. 여러 의문을 안은 채 수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