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朴대통령의 입' 9년] 24. 남북적십자 회담

淸山에 2009. 8. 16. 10:39
 
 

 

 
 
[중앙일보] 입력 2005.04.17 18:44 / 수정 2005.04.18 05:53
 

1972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 본회의를 위해 서울에 온 북측 대표 윤기복 북한적십자사 자문의원(右)이 경기중학교 동창이라는 신형식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2년 7월 4일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으로 고위급회담인 남북조절위원회가 진행됐으며 동시에 남북 대표들이 평양과 서울을 왕래하며 적십자회담 본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1차는 72년 8월 30일 평양, 2차는 9월 13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서울회의를 준비하면서 우리 측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TV .라디오의 현장중계를 어느 정도나 허용할 것인가였다. 북측 사람들이 서울 한복판에 와서 남한 국민에게 선을 보이는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이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나 생생하게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부작용도 없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지는 신중히 따져야 할 문제였다.

북측 대표단의 입경(入京)을 중계하는 것은 큰 문제없이 결정됐다. 문제는 본회의였다. 평양에서 열렸던 1차회의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도 북측 대표들은 격렬하고 적나라한 태도로 자신들의 공산체제를 선전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는 생중계를 제안했는데 준비회의에선 찬반이 엇갈렸다. 나는 생중계를 지지했다. 역사적 회동을 국민이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본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되었으며 박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유혁인 정무비서관 그리고 나를 배석시킨 가운데 집무실에서 빠짐없이 시청했다. 북측의 윤기복 대표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김일성 찬양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선전을 읽어내려갔고 박 대통령은 무표정하게 끝까지 듣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TV 생중계를 주장했던 나의 입장은 더했다. 우리측 대표의 순수한 인도주의적 발언과 비교하면 북측 대표들의 발언은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싸움판을 벌이자고 달라붙는 꼴이었다.

우리 대표단에서 회의를 중단시키려는 눈치가 보인다고 아나운서가 보도할 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평양에서 개최했던 1차회의도 저들의 정치선전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행됐는데 서울에서 하는 2차회의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단된다면 저자들이 노리는 수에 넘어가 우리만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나는 대통령께 "여기서 회의를 중단하면 좋지 않습니다.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내 의견에 동감이었다. 그자리에서 나에게 지시했다. "지금 전화로 정주년 대변인을 불러 끝까지 끌고 가라고 이르시오." 대통령은 계속하여 "저기 내 책상 위의 전화를 써요"라고 했다. 정 대변인은 금세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2차회의도 끝까지 진행되고 '무의미한' 내용의 합의문이 채택되었다.

회의 광경을 생중계로 지켜본 국민은 북측 대표단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생중계를 할 경우 국민의 반공의식이 해이해질 것이라 우려하며 반대했던 일부 인사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효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언론기관의 전화통에는 불이 났다고 하는데 모두 북측 대표의 무례함을 욕하는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북한 대표들이 서울에 와서 반공교육을 해준 셈이었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