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朴대통령의 입' 9년] 26. 70년대의 고민

淸山에 2009. 8. 16. 10:38
 
 
 

 

 
 
[중앙일보] 입력 2005.04.19 18:17 / 수정 2005.04.20 05:10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右)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있다면 인류의 흥망성쇠는 인과관계의 연속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현대사 중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1970년대를 돌이켜 볼 때 먼저 해야할 일은 70년대의 시대적 특성과 죽은 플레이어(player)를 중심으로 인과관계를 살펴보는 일이 아닐는지.

 



70년대는 세계적으로는 냉전에서 긴장완화로 이행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한반도는 계속 냉전시대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굳이 '중심과 변두리' 이론을 끌어댈 필요도 없이 체험적으로 그런 판단이 가능했다.

 

 

세계중심에서는 긴장완화가, 변두리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극렬한 무력도발이 각기 무대를 지배했고 이것이 중심과 변두리의 격차가 얼마나 큰 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미국 정부는 이런 가운데에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긴장완화가 필요했으며, 그것을 위해 주한미군의 철수 또는 감축이 긴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구실은 엉뚱했다. "한국은 이미 고도성장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자주국방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남조선 해방의 결정적 시기'가 곧 도래한다고 주장하면서 긴장완화에 역행하는 무력도발을 극대화 하고 있었다. 이처럼 상충하는 변화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긴장완화에 대응하는 남북대화를 추진하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추진해오던 경제개발계획을 계속 밀고 나가랴, 그야말로 삼중사중의 도전을 한꺼번에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야당의 일부 극렬세력은 긴장완화의 국제적 측면 만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층 일부의 지원을 받아 정권 타도의 불쏘시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달리는 말의 뒷다리를 묶어 놓으려는 것과 흡사한 짓이었다.

박 대통령과 야당의 비극적 관계는 긴장완화의 세계적 관점과 한반도의 특수성 사이에 놓인 현실적 괴리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지적(知的) 불모상태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나는 회고한다. 당시 정치인들은 곧잘 '시국관의 차이'를 운위했다. 이것은 바로 '한국의 특수성'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무력도발을 거짓이라 무시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과 안보상의 위험이 실재하기 때문에 이에 강력히 대처하면서 경제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력을 유효하게 조직화해야 한다는 정부.여당의 대립은 마침내 정치적 강경조치를 불러왔다. 박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선언(71년 12월 6일)과 10월 유신(72년 10월 17일)이 그것이다.

여기서 나는 정부.여당이나 야당, 그리고 일부 지식인 등 모든 플레이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과잉행동'의 주체노릇을 하지 않았던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잉행동은 또 다른 과잉행동을 불러온다는 평범한 이치를 왜 깜빡 잊었던 것일까. 위에서 본 대결구도는 정권의 주체는 달라졌을 망정 본질적으론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다. 불행한 일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