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朴대통령의 입' 9년] 37. 인간 박정희

淸山에 2009. 8. 16. 10:30
 
 
 

 

 
 

[중앙일보] 입력 2005.05.04 18:08 / 수정 2006.05.22 00:33
 

 

 


▶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 청와대에서 열린 장모 이경영 여사(右)의 생일잔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인간이었는가. 그의 인간상을 써 보내라는 편집자의 주문이 왔다. 아마 이 연재도 곧 끝나는가 싶다. 내가 어찌 감히 모시고 있던 분의 인물평을 무엄하게도 쓸 수 있을 것인가. 굳이 쓴다면 '조친'(提燈.일어로서 홍보성 기사를 일컫는 언론계 은어)밖에는 안될 것인데….
인간 박정희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시심(詩心)이 있었고 인간미가 넘치는 훌륭한 남편이요, 따뜻한 아버지였다. 가족들과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치며 테니스와 배드민턴을 즐기던 좋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매스컴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인간 박정희에 그런 모습은 별로 없었다. 장군.혁명가.정치가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근엄한 모습뿐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를 비롯한 청와대 공보비서실 직원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었다고 자책한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죄송스럽기 이를 데 없다.
 
뒤늦게나마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973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 박승규라는 대학교수 출신이 새로 임명되어 왔을 때 박 대통령은 그에게 휘호 하나를 써주었다. 글귀는 이러했다.
 
'시인춘풍(侍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
 
사람(백성)을 모실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하고 자기의 몸가짐에는 추상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뜻이다.
 
공무원은 마땅히 자기 몸을 먼저 추상처럼 다스려야 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상을 일깨워주는 휘호였다. 그런데 이것은 박 대통령 자신의 좌우명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이처럼 자기 몸을 가꾸기에 추상같았기 때문인가. 박 대통령의 몸에는 언제나 근엄함이 배어나 마침내 냉엄하다는 인상까지 풍기게 되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자기 말을 하기 보다는 남의 말을 듣기를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대인의 모습이다.때로는 상대방이 어려워서 감히 말을 못 드리고 있을라치면 벌써 그 의중을 알아채고 캐물어 고충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 준다. 이렇게 하여 도움을 받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이들은 죽을 때까지 박 대통령의 은혜를 잊지 못해 긴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곤 했다.
 
박 대통령은 고독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 박정희에게 고독은 일제치하에서 조선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한 진실의 추구였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온 그는 이념의 갈등 속에서 조국의 앞날을 고민하는 진실한 존재로서의 고독을 선택했다. 이렇듯 인간 박정희는 자기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고독을 씹으며 고독을 벗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따뜻한 인간미와 낭만적 시심조차도 고독의 그늘에 싸여 바깥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고작해 그것 뿐이다. 왜 그는 "그 무엇을 하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는가"라는 대목에 이를 때마다 목이 메었을까. '끝없는 꿈의 거리'는 조국의 근대화요, '그 무엇'은 조국통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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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5월 5일자 25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 중 '대인춘풍(待人春風) 대기추상(待己秋霜)'은 잘못된 표기입니다. 필자인 김성진 전 장관은 '시인춘풍(侍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이라고 적어 왔으나 담당기자가 육필(肉筆)원고를 잘못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