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朴대통령의 입' 9년] 38. 에필로그

淸山에 2009. 8. 16. 10:29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의 제2기 임기 6년이 끝나는 1984년보다 1년을 앞당겨 83년에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이양하고 하야할 결심이 있었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왜 83년이었던가. 경제.국방 면에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81년에 끝나기로 되어있었고, 82년엔 20개 예비사단의 편성과 장병들에 대한 국산 무기의 지급이 완료될 예정이었다.
 
박 대통령 집권 내내 김대중씨는 정권의 대표적인 반대자였다. 국익과는 거리가 먼 반대만 일삼았다. 그는 일본 등 해외에서 때로는 반국가행위로 오해받기에 충분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국가 권력기관의 과잉충성분자들에 의해 서울로 강제 납치되는 변을 겪었다. 그는 해외에서 미국 조야(朝野)에 대고 주한 미군을 철수하고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며, 해외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하거나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을 지지한 것으로 전해졌었다.
 
김씨는 서울로 끌려온 뒤 자택에서 기자회견(73년 10월 27일)을 통해 "나의 해외활동이 결과적으로 국가에 누를 끼치게 된 데 미안하게 생각하며…(중략)…이제 그 경위는 어떻든 무사히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나로 인해 한.일 양국 간의 우호관계에 금이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씨는 집권한 후 재야 시절 그의 일본 내 활동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한민통계 인사들의 고국 방문을 '허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왜 그랬는지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국민은 김대중씨가 집권 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함께 발표한 6.15선언에서 연방제 통일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것을 접했다. 국민은 김씨의 저간의 해외활동에 대해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반응을 보이며 의심을 증폭할 따름이다.
 

1978년 4월 방위산업 공장을 시찰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산 탱크 앞에서 한 관계자를 격려하고 있다.

 

시대를 거듭하면서 한국정치는 집권층 내부의 과잉충성분자들과 극렬 야당 내부의 극한투쟁론자들이 주도하는 이기주의적 정권투쟁의 무대로 전락한 듯하다. 국민의 자유와 복지, 국가와 민족의 안전과 번영은 한낱 겉치레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시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이 부(富)를 가득 채워놓았더니 그후 나타난 대통령들이 다 까먹고 이제는 빈 깡통마저 깨버리고 있다는 블랙유머가 떠돌고 있다. '김정일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라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의 북한에 자유와 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연방제 통일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믿거든 한.미동맹을 굳게 유지하여 북한의 핵 위협을 제거하는 데 궐기해야 한다. 만일 한국정부가 어정쩡하게 미국의 발목을 잡아 북한의 핵 문제에 타협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곧 우리 한국을 북한에 흡수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참변을 초래하는 것이 된다.
 
로마의 부르터스가 "공화제의 자유 회복을 위해" 카이사르를 살해한 뒤 로마는 경국(傾國)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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