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명소의 풍경

초속 20㎝로 단풍이 내려가고 있다

淸山에 2011. 10. 13. 15:37

 

 
 
 

초속 20㎝로 단풍이 내려가고 있다

 

▲ 오~매 단풍 들것네. 가을 하늘이 어느새 온통 붉게 물들었다. 설악산은 가장 먼저 단풍으로 갈아입는 산이다.

대청봉이 빨갛고 노란 단풍으로 치장했다.

 

 

▲ 대청봉에서 내려다 본 설악산 단풍 풍광.

*


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하나가 변하는 것만으로 가을이 다가옴을 알 수 있다. 한여름 짙은 녹음을 내뿜던 나무는 찬 바람을 맞으며 빨간빛·노란빛으로 물든다. 매혹적이지만 그 시간은 짧다. 앞으로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상과 작별하고 땅으로 되돌아가야 할 운명이니까.

이 같은 애절함 때문일까. 시인들은 단풍을 보면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곤 했다.

"보고싶은 사람 때문에/ 먼 산에 단풍/ 물드는// 사랑"(안도현의 '단풍')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가을 단풍은 소리 없이 산을 뒤덮는다. 처음엔 산마루부터 하나 둘 붉게 물들다가 어느새 능선에서 계곡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간다. 전국으로 보면 설악산을 기점으로 하루에 15~20㎞씩 남하(南下)한다. 초속 20㎝ 정도의 속도다.

단풍이 처음 내딛는 발걸음을 보기 위해 지난 6일 설악산 대청봉(1708m)에 올랐다. 단풍이 시작됐다는 강원지방기상청의 공식 발표(4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자동차로 한계령 고개를 넘는 순간부터 이미 산 한쪽 기슭엔 붉은빛이 완연했다.

남설악 오색약수터에서 등정을 시작했다. 설악폭포를 거쳐 가는 이 길은 대청봉까지 5㎞에 불과한 최단(最短) 코스다. 짧다는 것은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다는 말이다. 초입부터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걷기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숨이 찼다. 오르는 길 곳곳에 "심장마비에 유의하라"는 주의문구가 붙어 있었다.

'오색 코스'는 능선을 타지 않고 계곡을 따라 치고 올라가는 길이다. 걷는 내내 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니 풍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 덕에 대청봉에 다다르면 극적인 반전(反轉)을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막혀 있던 시야가 한꺼번에 뚫리며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보이는 서북(西北)능선에는 울긋푸릇한 나무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멀리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마침 해가 저물며 노을이 커튼처럼 내려왔다. 4시간 30분 동안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다.

대청봉에서 20분 떨어진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대피소에 묵으려면 설악산 국립공원 홈페이지(seorak.knps.or.kr)에서 미리 예약해야 한다. 대피소 취사실에서 등산용 버너로 지은 밥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산꼭대기에선 반찬이 많지 않아도 맛있다.

다음날 아침 대청봉에서 일출(日出)을 바라본 뒤 서북능선을 따라 걸었다. 하룻밤 사이에 붉은 나뭇잎이 늘어난 느낌이다. 중청(1664m)과 끝청(1610m)에 오르니 북쪽으로 설악산의 또 다른 줄기인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늠름하게 뻗어있다. 암석 주변으로 울긋불긋 물들어 있는 게 마치 붉은 벽돌로 쌓은 성벽 같다. 단풍의 붉고 노란빛이 빚어낸 장관이다.

 


사실 단풍의 빛깔은 나뭇잎이 원래 품고 있던 색이다. 평상시엔 초록색 엽록소(葉綠素)가 다른 색을 가린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엽록소가 사라지고 노란색 카로티노이드(carotenoid)와 붉은빛 안토시아닌(anthocyanin)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게 물든 서북능선은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다리가 아플 때면 중간중간 시야가 확 트인 바위가 나타난다. 넓은 바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신선(神仙) 놀음이 따로 없다.

대청봉에서 3시간 40분 남짓 따라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계속 직진하면 귀때기청봉으로 향하고 좌회전하면 한계령으로 향한다. '귀때기청봉'이란 이름은 자기가 제일 높다고 으스대다가 대청봉·중청봉·소청봉 삼형제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삼거리에선 이런 소소한 얘기들이 오간다.

이제 한계령 방향으로 꺾어진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1시간 30분이면 한계령 휴게소에 다다른다. 한계령에서 어제 오른 산을 다시 올려다본다. 하루 만에 더욱 붉어진 느낌이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붉은 기운이 더해지는 설악산 단풍은 오는 18일쯤 절정을 이룬다.

 

 

 

 

 

부지런히 발품 팔아 최상의 단풍을 찾아라

 

 

 

 

▲ 렌즈 85㎜·셔터속도 200/1sec·조리개 f/5.6·감도 200

 

 

'단풍 사진 찍는 법'이라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쳐넣으면 무수히 많은 글이 뜬다. 어떤 사람은 빛을 따져가며 찍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날씨를 가려가며 찍어야 좋은 단풍 사진을 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글쎄, 과연 그런가?

 

내가 생각하는 단풍사진의 '절대 원칙'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단풍 사진을 잘 찍고 싶다면 좋은 단풍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도 없다. 훌륭한 단풍만 찾아낸다면 다른 요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단풍을 찍으러 갔는데 사진이 별로였더라면 그건 그때 그 장소의 단풍이 별로여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색감이 화려하고 선명한 단풍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사진도 애매하게 나오는 것이다.

 

좋은 단풍은 그렇다면 어떻게 찾을까? 일단 체력이 좋아야 한다. 가장 찬란한 단풍은 대개 산꼭대기, 깊은 숲 속에 있다. 일교차가 클수록 단풍은 고와진다. 산 언저리나 산 중턱보단 일교차가 더 심한 산꼭대기가 단풍이 더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좋은 단풍을 찍고 싶다면 산을 부지런히 타고 남들보다 빨리 올라가야 한다. 단풍철엔 산마다 행락객으로 붐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단풍을 제대로 찍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이러니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몸을 움직여 인적이 드문 시간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찍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부지런할 필요도 있다. 기상청은 매년 홈페이지에서 단풍 정보를 제공한다. 전국 유명산의 단풍이 언제가 절정인지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이걸 뒤져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된다. 조금 수고롭지만 가고 싶은 산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전화를 걸어 직원에게 "올해는 언제 가야 단풍을 잘 찍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는 것도 좋다. 가장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체력을 쓰고 발품을 들여 최상의 단풍을 찾아냈다면 그땐 어떻게 찍어도 좋다! 찬란한 단풍은 역광(back lighting)에서 찍어도 근사하고 순광(front lighting)에서 찍어도 아름답다. 햇살이 투명한 날에 찍어도 매혹적이고 비가 온 다음 날 찍어도 빛깔이 진해 분위기가 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찍어도, 계곡물 위에 떠있는 것을 찍어도 멋지다. 사진에서 중요한 건 결국 '기술'보단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단풍 사진의 기본은 당연히 단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