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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은 사치품… 사치심 억제위해 축첩세 바더야

淸山에 2011. 9. 28. 06:53

 


 
 
첩은 사치품… 사치심 억제위해 축첩세 바더야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64)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kyckhan@chosun.com
 
 

조선일보 1924년 7월 5일자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은 '첩을 두면 세금을 바더'였다. 기사는 "사치품의 관세를 올니어 국민의 방탕한 긔풍을 억제한다는… 이때에 눈치 빠른 경성부 당국에서도 글거드리는 일에는 남에게 뒤지지 안이하랴… 조선에는 일본과도 달라 첩을 둘식 셋식 두는 일이 만흐나, 이것 역시 일죵의 사치덕 행위임으로 풍교상으로 보든지 사치심을 억제한다는 방면으로 보든지 첩 둔 사람에게는 장차 축첩세(蓄妾稅)와 가튼 특별한 세금을 바들 필요가 잇다고 연구중…"이라고 전했다.
 
그 사흘 뒤(7월 8일자) '사령탑'란엔 '통분생(痛憤生)' 이름으로, "사치품을 제어키 위함인지, 금년이 융통치 못한 연고인지, 별별세금이 다 난다"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축첩세를 실행할 계획"이라니 "경성부청에서 우리 민족을 야만으로 대접하는 것 갓흔 것이 더욱 통분하다"며 민족적 자존심이 상했음을 드러냈다.
 
축첩은 조혼과 함께 조선이 물려준 최대 악습이었다. 그래서 '축첩의 폐풍을 개(改)하라' 같은 사설이나(1920년 7월 22일자), 부인 문제의 첫째로 '축첩의 폐해'를 지적하는 논설이 끊이지 않았었다.
(1920년 6월 29일자)
 
경성부의 ‘첩을 두면 세금을 받겠다’는 방침을 전한 기사(1924년 7월 5일자)와 ‘축첩세를 바드라’는 여론을 전한 기사.(1924년 10월 5일자)
 
경성부의 축첩세 징수 방침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첩을 두는 바람에 적적한 공방에서 가진 슬픔을 맛보든 본부인 된 녀자들은 우슴을 웃으며 '첩세는 특별히 몇천원이라도 받았으면 죠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잇고… 남의 첩 된 녀자들은 은근히 가슴을 알케 되엿스며… 돈푼이나 넉넉히 남아잇는 사람은 '몇천원을 밧드라도 할 수 없지'하고… 돈 업는 사람은 이 소문을 긔화로 차차 관계를 멀리하는 사람도… 첩을 둔 가정에선 긔긔괴괴한 소문이 전하는 중"이었다. 경성부는 세수(稅收) 파악을 위해 발 빠르게 "방금 시내에 잇는 첩의 수효를 엄밀히 됴사"에 나섰다.
(1924년 10월 5일자)
 
축첩세는 그러나 시행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릴 사람들이 모두 축첩세를 물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오히려 축첩세 논란 몇 년 뒤, '귀족부호와 점잖은 상인(紳商)은 물론 영세한 봉급을 받는 월급쟁이, 영세 소농인까지 첩을 축한다'며 '축첩 전성시대'를 개탄한 것을 보면, 축첩제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1930년 4월 14일자)
 
'축첩의 폐해'는 끊임없이 지면을 장식했고 비판이 계속 됐음에도, 축첩제는 광복 이후까지 계속 살아남았다. 1949년 7월 비로소 '축첩한 자는 공무원에 임용할 수 없는' 법안이 발의돼 국회의원 40여명이 동의했고(1949년 7월 17일자), 그해 말 '축첩방지법' 제정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까지 발표되면서(1949년 12월 11일자) 본격 '축첩' 타파에 나섰다. 그러나 축첩 경관이나 군인, 교사 퇴출이 1960년대 초까지도 계속 이어진 것을 보면, 축첩제의 인습을 뿌리 뽑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