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한국을 사모아 群島로 옮겨라

淸山에 2011. 9. 27. 05:30

 

 
 
 
 
 
한국을 사모아 群島로 옮겨라
 
 
 1950년 12월 미국은 한국 포기 계획을 세운다. 
趙甲濟    
 

 1982년에 나온 '韓國戰 秘話'(조셉 C. 굴든. 타임스 북스)는 약700페이지의 大作이다.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총공세 직후 미국 정부의 당황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맥아더 사령관이 총퇴각을 명령하자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합참)는 한국을 死守할 것인가, 유엔군을 철수시킬 것인가로 연일 회의를 한다. 맥아더는 만주 폭격, 대만군 투입, 중국 해안 봉쇄,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고 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한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리 철수하면 안 된다. 싸우다가 질 경우에 한하여 철수를 허가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 합참 기획부서는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대비, 한국군과 한국인들의 처리 문제로 고심하였다. 합참은 일단 한국인(군인 포함) 32만8000명을 해외로 데리고 가기로 한다. 문제는 이들을 어디로 옮기느냐였다. 일본은 제외되었다. 조총련이 활동적이고 韓日 민족감정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령 사이판과 티니안도 제외되었다. 미군 기지의 안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美 합참이 잠정적으로 결정한 곳은 西사모아 群島의 두 섬, 사바이와 우폴루였다. 두 섬은 약800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가 1평방 마일 당 68명이었다. 합참은 이곳에 30여 만명의 한국인을 이주시켜 '뉴 코리아'를 만든다는 계획을 확정하였다. 이 계획을 비밀에 붙인 것은 새어나갈 경우 정치적 심리적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 12월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南下하는 가운데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하고 最惡의 경우를 상정한 계획을 세웠다. 막후에선 중국을 달래 휴전을 얻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당시 워싱턴의 고위층에서 진행된 회의록 어디를 읽어봐도 李承晩 대통령이나 한국군의 의견을 묻는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운명이 한국인의 개입 없이 논의되고 있었다.
 
 1951년 1월 서울을 빼앗긴 국군과 유엔군은 수원까지 후퇴하였다. 이 무렵 유엔은 미국의 동의하에 중국에 현위치 휴전을 제의한다. 이때 중국이 이 휴전안을 받아들였다면 한반도는 수원~울진線에서 분단되고 한강 유역과 서울은 북한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중국은 부산까지 밀고내려갈 수 있다고 誤判, 유엔의 휴전제의를 거부하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알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었겠지만) 우리의 운명이 몇 번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돌아오곤 하였다.
 
 한국 死守냐, 포기냐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준 사람은 매튜 리지웨이 신임 미8군 사령관이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중장 후임으로 부임한 그는 1951년 2월 반격작전으로 나와 서울을 수복, 전선을 38선 북쪽으로 밀어올렸다. 이때부터 한국포기론은 들어가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