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태풍은 예고편(豫告篇)이다
강천석 칼럼 [강천석 칼럼]
▲ 강천석 주필
정치 태풍은 국민의 야속한 마음 분한 마음 먹고 자라 '견고한 40%' 박근혜 대세론 단일화되면 '51대49 승부'는 정치 미신
안철수씨는 바람이다. 바람은 만질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부르르 떠는 문풍지에서, 흔들리는 잔가지에서, 펄럭이는 깃발에서 바람이 부는 걸 느낄 뿐이다. '안보에는 보수적이고 경제에는 진보적'이라는 천진난만한 사람 안철수씨가 야당 판에서 수십년 굵은 나무 허리를 우지끈 요절을 냈다. 잔솔밭의 낙락장송(落落長松)처럼 지난 4년 우뚝하니 버티던 '박근혜 대세론'도 휘청하고 있다.
서울 시장 후보로 나선 박원순 변호사의 쭈글쭈글한 풍선이 그가 숨 한번 불어넣자 지지율이 35%대로 부풀어 올랐다. 단 열흘에 이렇게 몰아치는 바람은 태풍밖에 없다.
태풍의 씨앗은 온도가 섭씨 26.5도 이상의 바다 위를 쓸고 가는 습기 머금은 따뜻한 공기다. 여기에 바닥은 저기압, 꼭대기는 고기압인 불안한 기압 구조가 얹혀지면 일대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게 열대성 저기압이다. 열대성 저기압이 열대 폭풍으로, 나아가 태풍으로 발달할지 여부는 오로지 바람의 에너지원(源)인 고온다습(高溫多濕)한 공기가 계속 공급되느냐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열대성 저기압은 폭풍 단계에서 일생을 마감한다.
태풍은 진행 방향 500km 앞에 강한 소나기를 뿌리며 자신이 접근하고 있음을 예고(豫告)한다. 그러다가 정작 '태풍의 눈'이 상륙했을 때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사람들이 마음을 놓는 바로 그 순간 강력한 해일이 바닷가 마을을 덮친다.
태풍 중심부에 형성된 초(超)저기압이 바닷물의 수위(水位)를 최대 7m까지 들어 올린 것이다. 태풍 피해자의 7할 이상이 익사자(溺死者)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해일이 뒤로 빠져나가면 태풍은 두 번째 주먹을 휘두른다. 나무뿌리를 뽑고 버스를 날리고 때로 열차를 기우뚱거리게 만드는 시속 250km의 강풍이다.
태풍은 육지에 올라 고온다습한 공기의 공급이 차단되거나 큰 산 같은 장애물을 만나야만 기세가 수그러든다. 태풍이 태풍답게 사는 건 고작 이틀이다. 그러나 태풍이 육지에 올라도 큰 늪을 건너면서 고온다습한 공기를 다시 공급받을 경우 세 번째 펀치를 휘두르며 내륙 깊숙이 1600km 이상 진격하기도 한다.
안철수 태풍을 맞으며 '아니, 이럴 수가…'를 되뇐 사람이라면 여(與)든 야(野)든 먼저 '한나라당 하는 짓이 예뻐서' '민주당의 장래성이 엿보여서' 선거 때마다 온갖 핀잔 들어가며 몰표를 던져준 경상도·전라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은 '그게 다 오도 가도 못한 표'라는 답을 쉽게 찾을 것이다. 이 '오도 가도 못하는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만든 게 안철수 태풍이다. 두 곳의 생각 깊은 사람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라는 '정치 감옥'을 벗어나 하늘을 훨훨 나는 날을 벌써부터 꿈꿔 왔다.
안씨는 강남에도 살지 않고 좌파도 아니다. 아직 정치 신고식도 정식으로 치르지 않은 그런 안씨가 한나라당의 하나 남은 대들보 박근혜 전 대표와의 가상 대결에서 43.3% 대 47.4%의 박빙(薄氷) 승부를 벌였다.
한나라당은 그 이유를 뭐로 설명하고 있을까. 국민의 55.7%가 정권교체를 희망한다는데도 민주당 계열 대선 주자 7명의 지지율을 모두 더해도 15% 선에 턱걸이하고 있다. 민주당이 그 까닭을 눈치 챘을까. 한나라당이 젊은이들 눈 밖에 난 '노인 정당'이 된 지 오래고 민주당은 번지수 잊힌 '문패 없는 정당' 꼴이 된 지 오래다. 국민 60% 이상이 한나라당과 민주당 소속이 90%에 육박하는 현재의 국회의원들을 바꾸자고 했다면 두 집안 다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안철수 태풍이 언제까지 위력을 발휘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자연 태풍은 고온다습한 공기를 먹으며 자라고, 정치 태풍은 야속해하는 국민 마음을 먹고 몸집을 불린다. 국민의 분해하는 마음은 이 순간에도 정치권으로 뭐에 빨린 듯 밀려들고 있다. 그럴수록 바닥과 상층부 사이의 기압골은 깊어지고 세상은 더 흉흉해진다. 씨앗만 떨어지면 언제든 태풍으로 커 갈 분위기다.
어쩌면 지금 안철수 태풍은 예고편(豫告篇)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태풍의 선발대로 태풍을 예고하며 뿌리는 소나기일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국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견고한 40%'라는 박근혜 대세론을 붙들고 큰 강(江)줄기가 작은 강줄기를 계속 외면하거나, 민주당이 단일화만 되면 대선은 51대49라는 점괘를 부적(符籍)처럼 모시고 거들먹거린다면 머지않아 해일과 강풍을 동반한 진짜 태풍이 저지대(低地帶)의 정치 마을 전체를 휩쓸어 버리고 말 것이다. 안철수씨는 개인의 정치적 성공 여부를 떠나 이미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흔들어야 할 이 나라 정치를 흔든 공로가 크다. 열대성 저기압으로 사그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정치권이 이대로 막무가내로 흘러간다면 국민은 언젠가 누군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 태풍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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