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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시에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3) - 鄭淳台

淸山에 2011. 9. 2. 12:25

 

  

 

 

“평화 시에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제3장 ①포청천과 魯智深의 무대- 開封: 萬歲山도 太湖石도 사라져버렸다
中國 史上 처음으로 ‘近代’를 호흡했던 나라. 敵에게 돈을 바치고 平和를 사려다가 결국 비참하게 패망한 나라. ‘남’의 힘을 빌려 敵을 죽이려는 以夷制夷(이이제이)와 遠交近攻(원교근공)을 좋아하다가 輕蔑(경멸)당한 나라. 富國强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득권층의 代案 없는 반대에 부딪쳐 不毛의 당파싸움만 일삼았던 나라. 끝내는 風流天子가 등장해, 든든한 인프라는 깔지 않고 國都와 궁궐의 디자인에만 골몰했다가 野性에 불타는 北方의 騎馬民族 국가들의 ‘밥’이 되었던 나라. 그것이 오늘의 韓國에 던지는 敎訓.
鄭淳台   

鄭淳台의 北宋 기행-開封/‘경제·문화大國’ 北宋 - 그들은 왜 ‘야만’이라 경멸했던

騎馬民族에게 능욕을 당했던가

 

開封은 城內에 운하가 통하는 ‘物流의 中心’

 

北宋 仁宗 시대의 대표적 淸官인 包拯(포증)을 모시고 있는 包公祠(포공사)에 들렀다. 포증은 ‘包靑天‧포청천’이란 이름으로 한국인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역사 인물이다. 대만에서 제작된 同名의 TV드라마 ‘포청천’이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포공사는 開封 시민의 성금으로 1987년에 세워졌다. <사진- 開封의 포공사(上), 포공사에 모신 포청천像(下)>

 

드라마 ‘포청천’의 첫 회분에서는 開封府 內 남서부를 흐르던 蔡河(채하)가 범람하여 1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형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정3품 開封府尹(개봉부윤)인 포청천은 엄정한 수사를 통해 그것이 天災(천재)가 아닌 人災임을 밝혀낸다.

 

즉, 仁宗이 총애하는 貴妃(귀비)의 친정 아버지인 方太師(태사‧ 정1품)를 비롯한 조정의 高官들이 蔡河의 하천부지에다 다투어 호화판 대형 정자를 지어 물길을 막은 데다 工部尙書(공부상서: 건설장관)와 밀착한 토목업자가 水害방지 공사의 자재를 빼돌려 不實시공을 한 탓이었다.

 

포청천은 특권층의 호화 정자 등 불법 건조물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부정에 관련된 공직자들의 머리를 작두로 삭둑 잘라버렸다. 包公祠에서는 세 종류의 작두를 전시하고 있다. 포청천이 “작두를 대령하라”고 외치면 死刑(사형)에 처해야 할 범법자 중 皇族(황족)에겐 龍머리 작두, 士大夫에겐 虎머리 작두, 서민에겐 개(犬) 작두가 준비되었다. <사진- 포공사에 진열된 3종의 작두>

 

開封은 물의 도시이다. 당시 성내로는 汴河‧ 蔡河뿐만 아니라 金水河‧ 五丈河도 흘러들었다. 현재 開封의 물길은 北宋시대와 크게 다르다. 채하가 흐르던 자리는 이제 큰 호수가 되어 있다. 이름은 포청천의 姓을 따서 ‘包公湖’라 한다.

 

開封의 內城 중심가에 위치한 大相國寺를 찾아갔다. 대상국사는 《水滸傳》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걸 魯智深(노지심)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현재 대상국사의 앞뜰에는 老松을 뿌리째 뽑아내는 巨漢 노지심의 像을 세워놓고 있다. 노지심은 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고 덤비는 ‘오지랖 넓은’ 캐릭터이다.

 

《수호전》은 양산박의 총수 宋江의 존재 등 몇 가지 史實을 제외하면 픽션이 거의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北宋 末期의 사회상을 가장 리얼하게 그려 놓은 작품이다. 《三國志演義》《西遊記》《紅樓夢>과 함께 중국의 四大奇書(사대기서)로 손꼽힌다. <사진-大相國寺 마당에 새워져 있는 노지심 像>     


노지심의 俗名은 魯達(노달)이다. 원래 그는 渭州經略府(위주경략부: 지금의 甘肅省 隴西市) 에서 提轄(제할)로 복무했던 군인이었다. 제할은 초급장교. 그의 직책은 변두리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支署(지서)의 주임에 상당했다.

 

進士 출신 文臣의 절대적 優位(우위)가 확립된 宋나라에서 지방군인의 지위는 열악했고, 그 임무도 국방보다 治安(치안) 쪽이었다. 좋은 쇠는 못을 만들지 않고, 좋은 인간은 병정을 만들지 않는다—이것이 尙武精神(상무정신)을 잃은 北宋 시대의 속담이었다. 평화 시대에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노달은 의지할 데 없이 떠도는 父女를 괴롭히는 지방의 유지 겸 깡패 하나를 때려 죽였다.  그는 五臺山(오대산: 산서성 大同과 太原 사이의 名山) 文殊院(문수원)으로 도망쳐 들어가 승려가 되려 했다. 문수원의 간부 승려들은 노달의 인상이 흉악하다고 모두 거부했지만, 오직 智眞(지진) 長老만은 魯達의 ‘非凡性’(비범성)을 높이 평가하여 剃髮(체발)을 허락했다. 더욱이 智眞 장로는 魯達을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法名 중 一字를 내려 智深(지심)이라 부르게 했다.

 

그러나 지심은 술에 취해 山門에 불을 지르는 등 행패가 낭자했다. 그는 몸에 요즘의 組暴(조폭)처럼 화려한 문신을 하여 花和尙(화상)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和尙은 2字로 표현한 僧(승)이다. 《수호전》에는 중[僧]을 4字로 표현하면 色中餓鬼(색중아귀)가 된다고 잔득 익살을 부렸지만, 花和尙 노지심은 여자에겐 담백한 대신 술과 개[犬]고기 마니아였다. 

 

智眞 장로는 지심에게 추방을 言渡(언도)했다. 그러면서도 開封의 大相國寺의 주지인 형제 제자 智淸(지청) 선사에게 智深을 맡아 달라는 소개장을 써서 주었다.

 

大相國寺의 주지는 지진 長老의 소개장을 가지고 온 살인 前科의 노지심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지에 대해 매우 고민했다. 마침내 노지심은 酸棗門(산조문) 밖에 있는 대상국사의 菜園(채원: 채소밭)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산조문은 開封 外城의 北門이다.

 

대상국사의 채소밭은 인근 깡패의 중요 수입원이었다. 깡패 수십 명은 신참 관리인 노지심을 길들이기 위해 몰려와 시비를 걸었다가 되려 노지심의 괴력에 걸려 분뇨 구덩이 처박히고 난 뒤 노지심을 ‘큰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채소밭 관리인 노지심은 ‘동생’들 앞에서 老松(노송)을 뿌리째 뽑는 등의 힘자랑을 하다가 그것이 ‘80만 禁軍 敎頭’(금군 교두)인 林沖(임충)에게 목격되었다. 禁軍은 황제 직속의 近衛軍, 敎頭는 槍術(창술)과 棒術(봉술)을 가르치는 武藝(무예) 교관이다.

 

이후 둘은 형제처럼 지내다가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결국은 떼도둑 집단인 梁山泊(양산박)에 入黨(입당)하게 된다. 《수호전》에는 그들이 反체제단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北宋 말기의 부패상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진- 林沖과 徐寧(출처: 水湖圖贊). 梁山泊 두령이 된 2인은 원래 禁軍의 장교였다>

 

《수호전》 속 호걸들의 대부분은 禮敎(예교) 따위에 속박되지 않고, 그들의 本性대로 마구 날뛴다. 속박 받을 일이 많은 서민들은 이들 호걸들에게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내게 마련이었다.  

 

大相國寺는 戰國(전국)시대 魏(위)나라의 재상 信陵君(신릉군)의 私邸(사저)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北齊시대엔 建國寺(건국사)라는 불교사원이 되었다가 唐나라 시대는 武測天(무측천)에 의해 재건되어 얼마 후 大相國寺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宋나라 때는 황실의 願刹(원찰)이 되어 융성했다. 대상국사의 後苑(후원)에 위치한 八角殿(팔각전) 내에 모신 千手千眼(천수천안)의 觀音像(관음상)은 중국 佛像(불상) 최고의 名品으로 손꼽힌다.

 

<開封의 宋都御街>

 

필자는 섭씨 40도에 가까운 폭염 속에서 開封의 宋都御街(송도어가)를 걸었다. 大路 양쪽은 전통적인 붉은 색 벽돌 건물로 통일시켜 北宋의 번화가를 재현하고 있다. 북한 의사 8명이 1963년 동도어가에 세운 高麗醫鋪(고려의포)도 보인다.

 

 

<高麗醫鋪>
 


中國史 최고의 名場面
  
宋都御街를 지나 龍亭(용정)공원을 둘러보았다. 용정은 宋의 궁궐이 있던 자리이다. 용정 내부에는 당시 宮廷(궁정)의 모습이 밀랍인형 등으로 재현되어 있다. 龍亭을 거닐면 宋 太祖 趙匡胤(조광윤)의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이 생각난다. 다음의 일화는 중국사 최고의 名場面(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龍亭과 필자. 용정은 北宋의 궁궐터이다>

 

宋 太祖 조광윤은 즉위 이후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매일 밤 주요 보직을 맡은 將帥(장수)들의 동정을 살피려고 몸소 미행을 했다. 함박눈이 오는 어느 날 밤, 불시에 심복 대신 趙普(조보)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국가의 百年大計를 물었다. 唐의 멸망 후부터 宋의 개국 전까지 54년간 다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던 만큼 太祖 조광윤에게는 쿠데타 방지에 의한 政權安保(정권안보)가 가장 火急한 문제였다.

 

조보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唐末부터 五代에 걸쳐 帝王이 빈번하게 교체된 것은 節度使(절도사)의 권력이 강대하고, 임금이 약한 逆立(역립)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서서히 節度使(절도사)의 권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절도사의 재량으로 처리되는 금전과 米穀(미곡)을 제한하고,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軍權을 중앙정부에서 몰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天下는 저절로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趙普의 말.
“近衛軍의 將官 石守信(석수신) 등은 부하를 통제할 그릇이 아닙니다.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太祖는 깊이 느끼는 바 있어서 곧 守信 등 開國功臣(개국공신)들을 불러 酒宴(주연)을 베풀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太祖는 주위의 侍臣(시신)을 물리치고 守信 등 武將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天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天子가 된 지금은 한시도 마음이 편할 때가 없고, 베개를 높이 하고 잠을 자지 못하는 형편이다. 누구든 기회만 있으면 天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지…….”

 

守信 등이 납작 엎드려 말했다.
“異常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天命(천명)이 정해졌고, 감히 폐하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太祖가 말했다.
“당연, 그대들에겐 그런 異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나 配下(배하)의 자들이 富貴를 탐하면 어떻게 될까. 그대들은 帝位를 욕심내지 않는다고 해도 한번 天子의 黃袍(황포)가 부하들에 의해 입혀진다면 어쩔 수 없잖은가”

 

《宋史》에 따르면 조광윤 자신도 부하가 황포를 입혀주는 바람에 回軍하여 그가 섬기던 後周의 일곱 살짜리 황제[恭帝]를 퇴위시키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어 宋을 創業(창업)했다. 그 상세한 과정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그야 어떻든 守信 등은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바보처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쪼록 臣들의 不憫(불민)이라고 생각하시고, 저희들이 가야 할 바를 가르쳐 주소서.”

 

“인생은 문틈으로부터 白馬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잠간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생에 있어 富貴를 구하는 것은 금전을 축적해서 스스로도 여생을 즐기고 자손에게도 물려주기 위해서다. 어떤가, 그대들도 苦勞(고로)가 많은 장군의 직책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땅을 골라 저택을 짓고, 자손의 번영을 꾀한다면……. 저택 안에 가수와 舞姬(무희)를 불러 매일 술과 함께 가까이 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러한 여생이 좋지 않겠는가.”

 

일동은 모두 拜伏(배복)하고 “臣들의 몸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다음날 일동은 모두 身病(신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냈다. 

漢 고조 劉邦(유방), 明 태조 朱元璋(주원장) 등 창업의 황제들은 모두 개국공신에 대해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감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꾀했다. 狡兎死走狗烹(교토사주구팽), 즉 사냥철이 지나면 토끼를 쫓던 사냥개가 푹 삶겨 보신탕이 된다고 했던 韓信의 말은 개국의 通過儀禮(통과의례)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宋 태조 조광윤의 온정주의는 역사의 淸凉劑(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