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의 눈으로 본 북한정권의 反민족성
趙甲濟
故 李基白 교수는 ‘韓國史新論’의「韓國史의 大勢」란 章에서 「지배세력의 변천을 기준으로 한 한국사의 흐름」을 이런 요지로 기술하였다. <고대국가에서는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귀족세력을 숙청, 전제군주화했다. 1인 권력집중이란 측면에선 한국 정치사에서 이 시대가 頂點(정점)이었다. 이후 지배세력의 저변은 확대된다. 신라 말기엔 하급 귀족인 六頭品(육두 품) 출신과 지방 豪族이 득세하여 이들이 신라 김씨 王族 중심의 권력체계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설한다. 고려시대에 들어가면 과거제를 통해 관리를 널리 등용하면서 文臣을 중심으로 한 귀족 지배세력이 그 저변을 넓히게 된다. 武臣亂 이후엔 군인들과 지방의 관리(鄕吏)들도 정권에 참여하게 되면서 지배세력의 범위는 다시 확장 된다. 문신-武人-향리로 이어지는 지배세력의 확대, 그 연장선상에서 朝鮮이 개국되었다. 조선조 개국의 주체세력은 군인들과 鄕吏(향리) 출신들의 사대부(학자적 관료)들이었다. 조선조 중반기엔 鄕吏의 전통을 이은 士林들이 趙光祖의 급진 개혁 실패를 딛고서 드디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여 지배세력의 기반은 全國의 선비계층으로 확장되었다. 조선조 후기에 가면 中人, 농민, 상공업자들이 사회적 지배세력으로 합류하면서 賤民(천민)과 노예는 사라지게 된다. 농민들이 주도한 동학운동, 도시 지식층과 상공업자들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 운동, 全국민이 참여한 3·1운동은 민중들이 피지배층에서 사회적 지배세력(정치참여자), 또는 역사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李基白 교수는 이런 지배세력의 확대과정, 또는 쉽게 말하면 정치참여층의 확장과정이 한국사의 大勢라고 定義하였다. 줄여서 말한다면 백성이 시민 또는 국민이 되어가는, 민주화의 과정이란 의미가 된다. 李교수는 1990년에 펴낸 이 通史 개정판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끝맺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社會正義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이어질 것이 기대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2000년간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사의 대세(大勢)를 타고 있고 북한은 이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북한에선 정치참여층이 김정일 일당으로 제한되었고 그나마 3代 세습에 의하여 신라 신문왕 시절로 돌아갔다. 북한정권을 민족사의 이단세력, 대한민국을 정통국가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민족사적 정통성이라 함은 민족사의 大勢를 계승하고, 민주공화적 정당성까지 확보해야 한다. 민주적 정당성은 인간 존엄성과 자유로운 투표를 보장하는 것이고, 공화적 정당성은 안보와 法治를 공동체의 윤리로 지켜가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민족적, 민주적, 공화적 정당성을 상실한 민족사적 반역세력이다. 특히 북한동포들을 노예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사회를 상대로 앵벌이를 시키는 事大賣國 집단이다. 李基白 교수는 작고하기 전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민족사 차원에서 보면 크게 퇴보한 체제입니다. 북한의 근·현대사는 金日成·金正日 개인 집안의 역사입니다. 「朝鮮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를 보면 임금에 대한 신하의 言路가 놀랄 정도로 트여 있었습니다. 東獨이 붕괴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韓國史를 전공하는 괴텔 교수가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한림대학에서 만났는데, 그의 말로는 북한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조선왕조보다도 더 전제적이라고 해야겠지요." "독재는 한국사에서 정통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李 선생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발해 중심의 정통론을 주장하는 세력에 대하여 이렇게 반박하였다. "渤海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靺鞨族(말갈족)을 통치했던 나라입니다. 만약 말갈족이 현재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다면 그들에게 渤海史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靺鞨史로 서술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로서는 高句麗 유민이 통치했던 만큼 渤海를 당연히 韓國史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統一新羅가 우리 민족사에서 大勢를 차지했고, 발해는 支流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新羅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主義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건 문제가 있는 시각입니다. 3·1운동을 事大主義라고 규정한 日帝 어용학자의 억지 주장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新羅더러 비록 망하더라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요. 더욱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唐과 치열한 전쟁을 하여 唐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라는 독립정신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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