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Classic 기악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에 대하여

淸山에 2009. 8. 15.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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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에 대하여

 

 

 

애국가로 더 잘 알려진 '한국 환상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망향의 설움과 조국의 웅대한 비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애국가를 부르는 한 영원히 잊지 못할 작곡가 안익태는 우리 나라 음악인들이 세계 무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세계적인 대가들에게 작곡과 지휘를 배웠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 무대에 선 ‘한국음악의 선구자’였다.
일본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올드 랭 사인> 선율의 애국가를 듣는 순간 그는 빼앗긴 조국을 회상하며 <애국가>를 작곡하려는 결심을 했다. 신시내티 음악원과 필라델피아 음대, 커티스 음악원을 거치면서 작곡과 지휘에 눈을 돌린 그는 마침내 뉴욕 카네기홀이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해 애국가 부분이 없는 <한국 환상곡>을 작곡해, 이 콩쿠르에서 입선했다. 1936년 다시 유럽으로 유학을 오르게 되어 베를린에 도착해 그 해 6월 귓가를 스쳐가는 멜로디에 잠을 깬 안익태는 이 선율을 오선지에 적었는데, 두 번 다시 수정하거나 재검토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위대한 애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안익태는 이 악보를 정리해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국민회 앞으로 보냈으며, 자신의 미완성인 <한국 환상곡>의 마지막 악장으로 사용하였다. 2년 후인 1938년에 이 곡은 안익태가 지휘하는 더블린의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관현악곡


1. 애국가 (1936년)
2. 한국환상곡 (1938년)
3. 교향시 패스토랄 (1939년)
4. 교향적 환상곡 제2번 (1939년)
5. 교향시 <강천성악> (1959년)
6. 애국지사 추도곡 (1962년)
7. 교향시 <논개> (1962년)

가곡


흰 백합화 (1962년)

 

 

출처 : 문화예술종합정보시스템

연주 형태에 대해서...
이 곡의 관현악곡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선 대 편성의 관현악이 눈에 띄는군요. 안익태는 이 관현악을 단순히 서양음악 식으로 취급하지 않고 여러 가지 형태의 혁신적인 면을 보이게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호른의 악구가 꼭 대금의 주법과 비슷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똑같은 악구를 플룻에 되풀이시키는 부분에서(5분 42초) 정말 절실히 느껴집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의 악기의 주법을 서양의 악기에 사용함으로써 정말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곡이 대단한 이유를 아실 겁니다.
동양의 악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꼭 동양의 악기가 연주한 것을 듣는 듯한 착각을 주죠.
합창에 대해서도 한 말씀...
굉장히 규모가 큰 합창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안익태는 외국에서 연주할 때도 합창은 항상 우리 말로 부르게 했답니다.

곡의 특징은 강조했듯이 한국의 악기의 주법을 서양의 악기에 사용함으로써 정말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과 자유로우면서도 긴밀한 형식, 특이한 관현악법과 화성 등이 될 것입니다.

 

안익태 미공개 악보 두 편 발견돼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자필 악보 두 편이 새롭게 발견됐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악보는 그동안 제목으로만 알려졌던 교향시 '마요르카'와 '포르멘토르의 로피'로, 말년에 안익태 선생이 정착했던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풍광을 담은 곡들입니다.

악보들에는 자필로 작품의 제목과 서명 등이 적혀 있으며, 지난해 유족들이 기증했던 유품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안익태 기념재단은 밝혔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악보가 공개된 안익태 선생의 작품은 '애국가'가 포함된 대표작 '한국 환상곡'을 비롯해 모두 14편으로 늘어났습니다.

안익태 기념재단은 올해 안익태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번에 발견된 두 곡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로 기념 음악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안익태 선생, 젊었을 땐 꽃미남
 2006-02-26 14:50 | VIEW : 1,761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 안익태 선생(1906~1965)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일본 동경국립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한 안익태가 193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줄 곳 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1946년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벨라’와 결혼한 안익태는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회’에 초청돼 25년 만에 그리운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안익태의 친필 사인이 담긴 독사진과 한국 방문 당시 ‘3ㆍ1절 노래’와 ‘한글날 노래’ 등을 작곡한 박태현 선생(1907~1993)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단독 입수했다. 안익태의 사진은 작곡가 박태현의 유족인 아들 계성씨(70)가 제공했다.
 



 

 

▲안익태 선생의 친필 사인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안익태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안익태 선생이 1955년 25년 만에 고국을 방문해 음악인들과 한 클럽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검정색 외투를 입고 서 있는 사람이 안익태.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안익태와 절친한 작곡가 박태현이다. 사진 아래쪽에 단기4288년(1955년) 4월 2일이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25년 만의 한국방문 마치고 떠나는 안익태 를 위하여 동료 음악인들이 4월 26일 마련한 송별회 모습이다. 사진 가운데 검정 양복 차림이 안익태.

▲안익태가 1955년 출국에 앞서 4월 28일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안익태. 그 바로 옆에 작곡가 박태현의 모습이 보인다.

▲안익태가 한국방문을 마치고 떠나면서 여의도 공항 비행기 앞에서 환송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꽃다발을 든 사람이 안익태다.

▲단기 4293년(1960년) 3월 10일 반도호텔에서 안익태, 박태연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안익태,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작곡가 박태현이다.

▲단기 4293년(1960년) 반도호텔로 찾아온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안익태,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박태현이다.

▲1960년 3월 한국방문을 기념해 ‘문총여러분께 한국방문 기념. 1960년 3월’이라는 글귀와 함께 안익태의 친필 사인이 담겨 있다. 이 사진은 1947년 영국 런던 필하모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안익태의 연주광경이다.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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