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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딸' 신숙자씨 남편 오길남 박사의 절규] <下>"가족 구해달라 애원했지만… 윤이상은 '北으로 돌아가라' 종용"

淸山에 2011. 8. 23. 05:50

 

 

  

 

 
 

"가족 구해달라 애원했지만… 윤이상은 '北으로 돌아가라' 종용"

 
 

['통영의 딸' 신숙자씨 남편 오길남 박사의 절규] <下>


"나 혼자 가면 당신과 애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자 아내는 내 뺨을 때리며" 범죄자가 되면 안돼" 꾸짖어
내가 入北시킬 뻔한 유학생 3년 전쯤 우연히 만나… 나를 외면하던 그 대학교수 송두율 석방대책위원 활동

1986년 11월 10일. 이날은 오길남·신숙자 부부의 결혼 14주년 날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부부는 헤어져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오길남은 1주일간의 공작 교육을 받고 짧은 휴가를 나온 터였다. 도청을 걱정한 부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퉜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가세요."

"나 혼자 가면 당신하고 애들은?"

"또 그 얘기. 애들을 정말 공작원의 딸로 만들 생각이에요?"

"…."

―아내가 탈북을 권했다는 건가.

"그랬다. 아내는 11월 11일 아침까지 내가 망설이자 난데없이 내 뺨을 때리며 말했다. '사람이 한 번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요. 당신이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데리고 북으로 들어온 잘못은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한 범죄자의 딸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빼내줘요. 안 되면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혜원 아빠, 나가세요.' 지금도 그때 아내가 한 말이 생생히 떠오른다. 아내는 그새 강한 엄마로 변해 있었다."

1986년 11월 21일 덴마크 코펜하겐공항에서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은 독일에서 한 달간 조사받고 풀려났다. 크리스마스 직전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는 바로 윤이상에게 전화했다. "선생님, 저 오길남입니다. 이북에서 도망해 왔습니다. 제 가족을 도와주십시오."

―왜 한국이나 독일 정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나.

"윤이상씨 힘이면 가족을 빼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가족을 북에 인질로 잡힌 상태였다. 어떻게 한국 정부에 얘기할 수 있었겠나."

―귀국 때까지 5년간 계속 윤이상에게 매달렸다는 건가.

"그랬다. 그 길 말고는 가족을 찾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1987년 4월 윤이상이 하노버로 와 탈북 후 처음 만났다. 그는 '왜 사람이 그렇게 가볍냐. 조금만 참고 있었으면 좋은 직장에 갔을 텐데. 가족을 생각해서 다시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대답을 못했다."

그해 10월 윤이상은 하노버음대로 오길남을 다시 찾아와 아내가 쓴 편지를 전했다.

"'혜원 아빠 보세요'로 시작하는 편지를 펼치기도 전에 눈물이 흘렀다. '원망하지 않는다.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아내의 편지를 읽으니 나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윤이상이 편지를 읽는 나를 보며 '부인이 정말 훌륭하다. 돌아와도 괜찮다고 하지 않나. 북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권했다."
▲ 북한으로 들어가기 전 독일 체류 시절, 신숙자씨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두 딸 혜원·규원 자매를 지켜보고 있다. 음악을 좋아했던
신씨는 어려운 생활 형편에도 아이들에게 바이올린만은 가르치고 싶어했다. /세이지코리아 제공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아내와 두 딸을 독일로 내보내 주면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윤이상은 기분이 나빴던지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당신은 미제 고용간첩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경솔한 짓을 하면 가족이 어떻게 된다는 걸 명심하라'고 소리쳤다."

―평양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안 했나.

"왜 안 했겠나. 죽을 때 죽더라도 가족과 함께 있으면 낫지 않겠나 싶어 숱한 날을 돌아갈 생각을 했지. 하지만 가봐야 결과가 뻔하지 않은가."

1991년 오길남은 윤이상의 호출을 받고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다. 오길남에게 건네진 것은 가족의 육성 녹음테이프와 사진 6장. 그 마지막 만남의 현장에 대해 윤이상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간절하고 확실한 소리, 두 딸아이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도 태연하였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며 "왜 아이들이 못났는가"하면서 히히덕거렸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면서 가족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가 통곡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호통치면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쫓아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묘사돼 있다. 실제로 그랬나.

"그랬지. 애들 사진 보며 참 못생겼다고 했다. 아이들의 얼굴,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내가 제정신일 수 있었겠나.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았는데…. 못난 아비 만나 생지옥에서 고생하는 아이들이 핼쑥하게 큰 모습을 보니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걸 히히덕이라고 표현하다니 인간이
그럴 수는 없는 거다."

―최근 '통영의 딸' 구출운동에 대해 정부 반응은 없나.

"언론에 몇번 보도가 나오고 국가인권위 김태훈 북한인권특위 위원장이 만나자고 해 한 번 만났다. 지금까진 그게 전부다."
 
▲ 오길남씨는“죽기 전에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울어보는 게 하나 남은 소원”이라 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가족을 만나면 뭘 하고 싶나.

"다른 게 있겠나. 그냥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실컷 울어보는 게 소원이다."

―당신이 입북시키려다 포기한 당시 유학생들을 만나본 적 있나.

"탈출 직후 한 사람은 직접 만나 '북한 사람들 만나지 말라'고 일러줬다. 또 한 사람은 3년 전쯤인가,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만났다. 대학교수가 돼 있더라. 우리 둘의 사연을 알고 있던 혼주가 그를 불러 내게 소개시키려 했는데 날 쓱 보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알고 보니 그가 송두율 석방대책위 위원이었다. 나는 그의 북한행을 막아준 은인이 아니라 배신자였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를 위해 내 가족을 희생했는데…. 허탈했다."
 
 
 
 

 

 
 

"하루도 술 안 마시면 잠이 안 와… 짐승의 꼴이라도 살아만 있어달라,

집 앞 교회 보며 매일 눈물로 기도"

 
 

오길남씨 회한의 나날

19년 만에 다시 만난 오길남씨는 몸이 많이 불어 있었다. 100㎏이 넘는다 했다. "모두 술 살"이라 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최근엔 열흘 넘게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 발견되기도 했다. 기억력도 많이 떨어진 듯 묻는 것마다 "잘 생각이 안 난다"며 미안해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치매 초기 단계다. 건망증도 심하고 매사에 의욕이 잘 안 난다."

―병원에서 진단받았나.

"내가 느끼는 거지. 진단 안 받아도 알지. 그러니 말도 어눌하고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의 말대로 인터뷰 내내 그와의 대화는 자주 끊겼다. 엉뚱한 길로 헤매기를 되풀이했다.

―술은 매일 마시나.

"안 마시는 날이 있나. 잠이 안 오는걸."

―생활은 어떻게 하나.

"국민연금 23만원 받고 있고 조카 도움을 받아 한 달 생활비가 70만원쯤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퇴직금하고 인세 등으로 조금 모은 돈은 다른 조카에게 맡겨놨다. 내가 죽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오면 여기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연구활동은 안 하나.

"책은 이제 안 본다. 날 좋으면 조카가 키우는 강아지 데리고 서너 시간씩 산책하며 소일한다. 작년까지는 산에 갔는데 살이 찌니까 다리에 쥐가 나서 못 가겠더라."

―교회에도 다녔다고 들었다.

"한때 다녔지. 원래는 아내와 나 모두 천주교 신자인데 한국 온 뒤 친구들이 교회로 이끌더라. 요즘은 안 나가지만 집 앞에 큰 교회가 하나 있다. 그 교회를 보며 기도한다. '짐승의 꼴이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달라'고. 근데 그러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 아내와 애들 생각하면 나 자신이 기가 막혀 그냥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울려고 한 것도 아닌데."
 
 
 
 

 

 
 

'통영의 딸' 구출 서명 4만명 육박… 인권위도 해결 나서기로

 
 
 
22일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경남 통영시 동호동 통영현대교회 선교관. 통영이 고향인 신숙자씨 모녀 사진과 사연, 정치범수용소 실상을 고발한 그림 등이 전시된 이곳엔 평일인데도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최진호(46·충북 청주)씨는 "모녀 구출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다"며 "청소년들이 북한 실상을 제대로 아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통영 전시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통영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도서관에서 첫 전시(지난 5월 25일~6월 19일)를 가진 후 경기 화성 봉담읍 흰돌산수양관(7월 4~18일)으로 갔다가, 다시 통영으로 돌아왔다. 현대교회와 롯데마트 통영점 등 두 곳에서 열리며, 현대교회에서는 신숙자 모녀 구출을 위한 서명도 받고 있다. 서명은 다음 카페에서도 받고 있다. 13만명의 통영시민 중 2만1800여명을 비롯, 지금까지 전국에서 3만7000여명이 서명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북한 정치범수용소 실상 공개, 국제 NGO와 연대를 통한 여론화, 세미나, 정책 권고 등을 통해 이 문제 해결에 나서기로 했다.

▲ 경남 통영시 동호동 현대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이 북한 수용소에 있는‘신숙자씨 모녀사진’
등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오길남 신숙자 가족의 비극적 스토리는 본지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1992년 7월과 1993년 1월 월간조선이 '한 진보적 지식인의 환상 입북·환멸 탈출 귀환의 전 과정 고백, 오길남의 남한과 북한' '귀향한 자수간첩 오길남의 절규' 등 기사를 잇달아 게재했다. 지난 6월 20일엔 주간조선이 '북에 있는 통영의 딸-신숙자 모녀 구출운동 통영시민들이 나섰다'란 제목의 커버 스토리로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