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이승만의 나라, 아데나워의 나라

淸山에 2011. 8. 20. 08:08

 

  

  

 

 
 
 
 
이승만의 나라, 아데나워의 나라
 
 
 
강천석 주필 

 

독일 통일은 자유 진영과 시장 경제 선택한 아데나워 덕분
독일은 아데나워 偉人으로 꼽고 한국은 이승만에 분단 元兇 딱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은 논쟁적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대통령 시절에도, 사후(死後) 46년이 흐른 오늘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KBS가 제작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초대 대통령 이승만'편을 둘러싸고 '왜 그런 걸 만드느냐' '왜 눈치 보며 방영을 머뭇거리느냐'는 논란이 벌어졌다. 박정희·김대중·정주영·이병철은 소개하면서 초대 대통령을 빼놓는다면 그건 한국 현대사 열전(列傳)이 아니다. 며칠 전엔 남산에 높이 3m의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는 걸 놓고 여러 말이 오갔다. 아무도 김일성 회갑인 1972년 평양 혁명박물관 앞에 세워진 높이 20m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과 북한 방방곡곡의 1만개를 넘는 김일성 동상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백발이 성성한 일흔 나이의 이승만이 식민지 조국을 떠난 지 33년 만인 1945년 10월 16일 고향 땅을 다시 디뎠을 때, 그보다 한 달 앞서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으로 들어온 김일성은 나이 서른셋의 새파란 젊은이였다. 김일성이 소련한테 선물 받아 아들에게 유산(遺産)으로 물려준 나라는 지금

망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세계의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비교할 대상은 김일성이 아니라 1949년 나치 독일의 폐허 위에 서독을 세웠던 초대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다. 아데나워가 1959년 집권당 전당대회에서

"소련이 독일 분단이 자신들의 이득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 온 힘을 다해 통일의 기회를 낚아채야 한다"고 연설할 때 체구가 거대한 스물아홉 살의 청년당원이 청중 속에 섞여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989년 그때의 청년 헬무트 콜은 서독 마지막 총리로서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초대 통일독일 총리에 취임했다.

독일 통일 후 여론조사에서 독일 국민의 33%가 독일 근현대사의 가장 돋보이는 위인(偉人)으로 아데나워를 꼽았다. 1870년 수많은 영주국(領主國)으로 갈가리 찢겨 있던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8%로 2위를 차지했다. 독일 국민의 위인 리스트에는 '동방정책'으로 동독을 껴안은 총리, '라인강의 기적'으로 독일 경제를 일으킨 총리 이름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데나워에겐 평생 '권모술수에 능란한 늙은 여우'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는 '의사가 내게 당신 건강은 길어야 2년뿐이라 했다'는 말로 경쟁자들을 안심시킨 다음 일흔셋의 나이에 초대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다. 총리 재임 14년 내내 자신을 보좌해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부총리 에르하르트의 앞길을 온갖 술수로 가로막았다. 그것으론 부족했는지 간신히 총리에 오른 에르하르트의 등을 떠밀어

기어코 낙마(落馬)시키기까지 했다.

 

 나치에 부역(附逆)한 사람을 군(軍) 요직에 임명하며 "내가 NATO군을 사열하러 갈 때 열아홉 살짜리 장군과 함께 갈 수는 없지 않으냐"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아데나워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던 드문 정치인이었기에 그게 가능했다는 설명이 따르기는 한다. 독일 국민이 '늙은 여우'를 현대 독일의 최대 거인(巨人)으로 꼽은 건 아데나워가 '서독을 자유 진영에 튼튼한 밧줄로 묶고 그 위에 시장경제를 얹어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는 이유에서다.

이승만의 권모술수는 아데나워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상해 임정 대통령 시절에는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고, 대한민국 대통령 시절에는 '발췌개헌'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등의 헌법 훼손 파동 끝에 4·19혁명을 불러오고 말았다. 친일파를 등용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우리 대학생들의 90%가 이승만을 친미사대주의자, 영구 분단의 원흉, 독재자로 알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이승만 이미지는 더 부정적(否定的)이다. 독재자라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독립운동 시기, 건국 시기, 6·25사변 시기, 한미 안보조약 체결 시기에 국익을 놓고 이승만과 미국 간에 계속된 기나긴 줄다리기의 역사와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때보다 10개월도 더 전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북한에서 친소 정권 수립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만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어도 이승만에게 친미사대주의자, 분단의 원흉이란 딱지는 감히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를 비틀어도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터를 자유진영의 울타리 안에 잡고 불완전하게나마 시장경제의 씨앗을 뿌렸다는 사실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는 오늘 그 길을 좇아 아데나워의 독일처럼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광복(光復)과 국치(國恥)의 날이 함께 들어 있는 곡절 많은 8월이 가고 있다. 이제 이승만을 둘러싼 100년 논쟁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