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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 단아한 만첩 백매화. 단정한 만첩 묵매. 매화나무 기둥에 석회유를 발라 놓은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팡허팅(절강성 항주 방학정) 매원.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 매원과 루쉰 좌상. 루쉰 고거 매화와 학을 가장 사랑한 북송시대의 은둔 시인 임화정 처사의 묘소.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 방학정 현판. 동기창이 학이 날아가는 듯한 신필로 쓴 <무학부> 글씨 서호 낙조,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서호십경 추근의 묘 추근의 고거 여성 혁명활동 악묘: 악비 장군의 묘 진회 일파 네사람의 철상 악비장군의 무덤 영은사 비래봉 석굴 조상
당나라 명재상 송경의 매화부 동파육
룽징(용정) <거지닭>으로 소개된 찌아오화통즈(규화동계) 용정 중국차 박물관(龍井 中國茶汁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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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청고 단아한 만첩 백매화. 꽃받침이 녹색이고 꽃잎은 백색이며 세 겹으로 둘레[윤:輪] 없이 피었다.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중국 절강성 항주 서호 고산 방학정:中國 浙江省 杭州 西湖 孤山 放鶴亭) 매원 현지 촬영. Beautiful maehwa (meihua ; ume ; plum). The plum garden, Fang He Ting (Crane Pavilion), Gusan(Solitary Hill)., Xihu (West Lake), Hangzhou, Zhejiang, China. |
매화나무의 매(梅)자는 모(某)에서 모(槑)로 변하여 梅가 되었다고 한다.
매화나무는 장미과(rosacea)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서 중국이 원산지이다. 중국 이외에 일찍이 기원전 2세기경에 우리나라에 전래 되었고 우리나라를 거쳐 8세기경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고 중국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참고: 龙虎梅花节论坛; http://www.longhoo.net/gb/longhoo/news/culture/special/node1689/node1696/userobject1ai26159.html ). 19세기경 유럽으로도 전파되었으나 매화나무는 역시 동양의 꽃나무이다. 세계적으로 야생 또는 재배 매화의 중심은 중국이다.
중국의 매화재배 역사는 무려 3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1975년 허이난 안냥 (하남 안양: 河南安陽 Heinan Anayang) 은대 묘장(殷代墓葬) 중에서 출토된 과매핵(顆梅核)은 3200년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매화를 애용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매화의 고향은 중국의 악시 촨동(악서 천동: 鄂西、川東 O-hsi, Chandong)으로 지금의 후베이셩 우창시엔(호북성 무창현: 湖北省武昌縣 Wuchang, Hubei)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도홍경(陶弘景)의 《명의별록(名醫別錄)》을 인용하여 "매실은 한중 산곡에서 생산된다[매실생한중산곡(梅實生漢中山谷)]"는 기록이 있다. 또한 《화경(花鏡)》은 "오래된 매화나무가 많기로 이름난 곳은 오하, 오흥, 서호, 회계, 사명 등처로서 수백년 된 것들이 많다[고매다저명우오하, 오흥, 서호, 회계, 사명 등처, 매다백년로간(古梅多著名於吳下、吳興、西湖、會稽、四明等處,每多百年老幹)]"고 하였다.
매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농본초경》과 《시경》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경》에는 “표유매 기실칠분(漂有梅,其實七分)”이라 기재되어 있다. 《하소정(夏小正)》에는 “정월매행시도즉화(正月梅杏柂桃则华)”, “오월자매(五月煮梅)” 라는 표현이 있고 《좌전》에는 “和如羹焉,水火醯醢盐梅,以烹魚肉”이라는 기술이 있는데 이것은 주(周)나라 이전에 이미 매실을 식용으로 사용한 흔적이다. 또한 《서경잡기(西京雜記)》를 보면 한(漢)나라 무제(武帝)시대에 이미 7종(朱梅、紫諾梅、紫帶梅、同心梅、麗友梅、燕梅、猴梅)의 매화 품종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양웅(揚雄 BC53-BC18)의 《촉도부 (蜀都赋)》에는 "피이앵 매 수이목란(被以櫻, 梅, 樹以木蘭)"이라는 기술이 있다. 한(漢)나라로부터 수(隋) 당(唐)을 거치면서 매화재배가 번성하여 강매(江梅), 홍매(紅梅), 녹악매(綠萼梅)등 다양한 품종이 전해졌다. (참고:http://www.zschina.org/gjmhj/6.htm)
고대 매화 재배의 최전성기는 송(宋)나라 시대이다. 이때 북송에는 임포(林逋, Lin Bu, 967~1028), 소식(蘇軾, Su Shih, 1036~1101), 진관(秦觀, Qing Guan, 1049~1100), 왕안석(王安石, Wang An Shi, 1021~1086), 구양수(歐陽修, Ou Yang Xiu, 1007~1072) 등이, 남송에는 진량(陳亮, Chen Liang, 1143~1028), 양만리(楊万里, Yang Wan Li, 1127~1206), 범성대(范成大, Fan Chen Da,1126~1193) 등의 인물이 있었다. 특히 범성대는 쑤저우 석호 벽범촌(蘇州石湖辟范村)에 12종의 매화나무를 옮겨 심어 관찰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기술하여 서기1186년 《범촌매보(范村梅譜)》를 펴냈다. 이 책은 세계 최초의 매화 전문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원(元)나라 때 저명한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왕면(王冕, Wang Mian, 1287~1359)은 구리산(九里山)에 은거하면서 매화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이름을 매화옥(梅花屋)이라 칭하고 매화 시와 그림을 즐겼다. 그는 조조(曹操, Cao Cao, 魏武帝, 155~220)가 이끄는 군사가 매실을 쳐다보며 갈증을 풀었다는 《삼국지연의》의 ‘망매지갈(望梅止渴)’ 고사를 인용하여 「매화전(梅花傳)」이라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권세나 부귀를 천시하는 매화의 고귀한 정신을 닮은 왕면의 인격을 암암리에 비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묵매(墨梅)라는 시로 인하여 묵매의 이름을 드높였다고 한다.
명나라 때에는 난징(남경:南京)의 매화산(梅花山) 쑤조우(소주:苏州)의 광복(光福), 항조우(항주:杭州)의 서계(西溪) 등이 매화 감상의 명승지로 유명하였다.
청나라 초기에 간행된 《광군방보(廣群芳譜)》에는 22종의 매화나무 품종이 소개되어 있다.
신해혁명(辛亥革命)후 매화재배 기술과 사업이 발전하여 품종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1937년 난징에서 간행된 《중국수목분류학(中國樹木分類學) 陳嵘 등이 지음》에는 매화 변종의 명칭과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梅《시경》[别称春梅(南通);柟(尔雅);橑(加草头)《礼记,广志》 学名 Prunus mume Sieb.& Zucc
변종 (1)녹악매《화경》P.mume var. viridicalyx Mak. 출처:범촌매보 (2)品字梅《화경》P.mume var. pleiocarpa Maxim. 心皮在一花中有三至七枚,一花内能结数果实。 (3)早梅《군방보》P.mume var. microcarpa Mak. 花小,单瓣。果实小,圆形。 (4)*细梅P.mume var.cryptopetala Mak. 萼绿色而微带紫色,花瓣五片,甚小。 璋按:*号表示这个汉名是陈氏目拟的,下同. (5)杏梅《화경》P.mume var.bungo Mak. 枝强大,小枝暗紫色,叶大,花亦大。半重瓣。 璋按:出处应为范村梅谱。 (6)*毛梅P.mume var. goethartiana Koehne 叶、花梗、萼、子房与花往下半部均有毛。 (7)*白梅P.mume var.alba Rehd. 花白色,单瓣。 (8)红梅《화경》P.mume var.alphandil Rehd. 花粉红色,重瓣。 璋按:出处应为石曼卿诗。 (9)冰梅《화경》P.mume var. albo-plena Bailey 白色,重瓣。 (10)照水梅《화경》P.mume var. pendula Nichols 枝下垂,花开时朵朵下向而香浓。 (11)*光梅 P.mume var. tonsa Rend. 叶近於平滑无毛,花白色。 (12)*香梅 P.mume var.laciniata Maxim. 叶楔形或披针形。花有香气,淡红色重瓣,亦有单瓣者。
1942년 증면(曾勉) 교수가 매화품종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최초로 시도하였다. 그후 1947년에는 난징의 진준유(陈俊愉)교수가 용유매(龍游梅)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 이후에는 중국 전역에서 매화 품종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
1962년 조사보고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 산재한 매화나무 품종은 230종에 이른다고 한다.
쓰촨(사천: 四川, Si Chuan) 대도하(大渡河)상류 단파현(丹巴縣)의 산계곡(해발 1900~2000m)과 아롱강(雅礱江) 하류 회리현(會理縣) 산간지대(해발1900m), 천악(川鄂) 산악지대, 광시(광서:廣西, Guang Xi) 흥안현(興安縣) 산계곡 등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야생 매화나무 서식지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매화를 많이 재배하는 곳은 서남지구(사천, 운남, 귀주)로부터 장강유역의 화중지구, 화남지구, 화동지구(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강서성, 복건성, 산동성)를 거쳐 대만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한다.
중국 4대 매원(中國四大梅園)으로는 우한(무한: 武漢, Wuhan)의 동호마산매원(東湖磨山梅園,1956년 창건,면적 500亩,248 품종,5000주,중국유일의 매화문화관인 일지춘관:一枝春館이 있음), 난징 매화산 매원(南京 梅花山梅園, 1929년 개원,면적400亩,230품종 13000주), 우시(무석:无錫, WuXi) 태호매원(太湖梅園, 1912년 창건, 면적 81亩,4000주, 분매 2000여분), 저지앙(浙江) 여항현 초산(余杭縣超山)을 손꼽는다. 특히 쑤조우(蘇州) 서남쪽 30 Km지점에 위치한 광복향(光福鄕, Guangfu) 등위산(鄧尉山)을 가리켜 "등위매화갑천하(鄧尉梅花甲天下)" 또는 "향설해(香雪海)"라 부른다.
그 밖에도 광동(광동:廣東 Guangdong) 증성현 나부산(增城縣羅浮山), 샹하이 정산호 매원(上海 淀山湖梅園, 면적190亩,5000주,40품종), 지앙쑤(강소:江蘇) 양주(揚州), 항조우 식물원내 영봉(靈峰)도 관매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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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단정한 만첩 묵매(墨梅).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 매원. Beautiful pink maehwa(meihua ; plum ; ume). The plum garden, Fang He Ting (Crane Pavilion), Gusan, Xihu (West Lake), Hangzhou, Zhejiang, China. |
중국에서 매화의 인물로 알려진 대표적 인물은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로 유명한 맹호연(孟浩然, Manghoyin: Menghaoran: Ming Hui, 689─740)과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리는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967~1028)이다. 맹호연은 " 바람서리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 밟으며 매화 찾아 떠도는 것을 즐기었다"는 다음 시가 있을 정도였다.
數九寒天雪花飄,大雪紛飛似鵝毛。浩然不辭風霜苦,踏雪尋梅樂逍遙。 수구한천설화표 대설분비사아모 호연불사풍상고 답설심매낙소요
<번역>
아득한 겨울 하늘에 눈꽃이 바람에 나부끼고 많은 눈가루는 오리털처럼 흩날리네 호연은 바람 서리 추위를 무릅쓰고 눈 밟으며 매화 찾아 떠돌며 즐기네
이 두 인물은 매화를 통하여 동양인의 정신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북송시대에 항조우 시후 구샨(항주 서호 고산)에 은거하면서 매처학자로 이름난 임화정 처사는 서호의 신선으로 불릴 정도였다. 처사는 벼슬하지 아니하고 은거하였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에 대한 존칭이다. 임화정처사는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에서
衆芳摇落獨暄妍 占盡風情向小園 疏影横斜水清浅 暗香浮動月黄昏 霜禽欲下先偸眼 粉蝶如知合斷魂 幸有微吟可相狎 不須檀板共金尊
중방요락독훤연 점진풍정향소원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 상금욕하선투안 분접여지합단혼 행유미음가상압 불수단판공금준
<번역>
모든 꽃 다 떨어지고 없으나 홀로 곱고 아름다워 작은 정원의 풍정을 모두 차지하였네 어스름 그림자 비스듬히 드리운 맑고 얕은 물 위에 그윽한 향기 황혼 달빛에 떠도네
겨울새는 내려 앉으려 주위를 먼저 살피고 꽃나비가 매화 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란 듯 하네 다행히 나는 시를 읊으며 서로 친할 수 있으니 노래 가락 악기나 술 항아리도 필요없네
라고 읊었는데 "그윽한 향기 황혼 달빛에 떠도네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黄昏)]" 이라는 구절이 명문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로부터 "매화"와 "달"이 함께하고 "암향"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었다.
또한 동파 소식(東坡 蘇軾, Dong Pu, Su Shih, 자는 자첨:子瞻,1036∼1101)은
羅浮山下梅花村,玉雪爲骨冰爲魂。 紛紛初疑月桂樹,耿耿獨與參橫昏。 先生索居江海上,悄如病鶴棲荒園。 天香國艷肯相顧,知我酒熟詩清溫。 蓬萊宮中花鳥使,綠衣倒挂扶桑暾。 抱叢窺我方醉臥,故遣啄木先敲門。 麻姑過君急掃灑,鳥能歌舞花能言。 酒醒人散山寂寂,惟有落蕊黏空樽。
나부산하매화촌 옥설위골빙위혼 분붑초의월계수 경경독여참횡혼 선생색거강해상 초여병학서황원 천향국염긍상고 지아주숙시정온 봉래궁중화조사 녹의도궤부상돈 포총규아방취와 고유탁목선고문 마고과군급소쇄 조능가무화능언 주성인산산적적 유유낙예점공준
라는 매화시를 남겼다. 이로부터 광동성 증성현 나부산(廣東增城縣 羅浮山)을 가리키는 나부(羅浮, 뤄푸)라는 지명은 매화를 지칭하는 상징어가 되었다. 또한 "옥설처럼 흰 몸과 얼음처럼 차거운 넋 [옥설위골빙위혼 (玉雪爲骨冰爲魂)]이라는 구절이 널리 애송되고 있다.
송대 문천상(文天祥, Wentianxian, 1236─1283)은 「매(梅)」라는 시에서
"梅花耐寒白如玉 干涉春風紅更黃 若問司花示薄罰 到底不能磨灰香"
매화내한백여옥 강섭춘풍홍갱황 약문사화시박벌 도저불능마회향
이라 표현하고 있다.
원(元)나라때 왕면(王冕, Wang Mian, 1287~1359)이 구리산(九里山)에 은거하면서 매화나무 천그루를 심고 집이름을 매화옥(梅花屋)이라 칭하고 매화 시와 그림을 즐겼다. 그의 「묵매(墨梅)」라는 다음 시가 천하에 묵매의 이름을 드높였다고 한다.
我家洗硯池頭樹 個個花開淡墨痕 不用人夸好顏色 只留淸氣滿乾坤 아가세연지두수 개개화개담묵흔 불용인과호안색 지유청기만건곤
(번역) 우리집 벼루씻는 연목가에 우뚝한 나무 하나하나 꽃피어 엷은 먹이 묻었네 자랑하며 좋아하는 얼굴빛 사람들 쓸데 없고 단지 하늘과 땅에 가득한 맑은 향기에 머물러 있네
색깔이 붉은 매화를 홍매(紅梅)라 부른다. 송나라 범성대(范成大)가 쓴 《매보(梅譜)》에는 "홍매는 겉으로는 매화이나 꺾어보면 살구와 비슷하고 향기도 살구와 비슷하다[홍매표격유시매 이벌밀즉여행 향역류행(紅梅標格猶是梅,而找密則如杏,香亦類杏)]"고 하였다.《화경(花鏡)》에는 "원앙매, 쌍두홍매, 단판홍매, 연지매, 주매(鴛鴦梅、雙頭紅梅、單瓣紅梅、讌脂梅、朱梅)" 등 18종이 기재되어 있다. 총구(總龜)는 "홍매는 맑기와 요염하기가 모두 빼어났다(紅梅清艷兩絕)"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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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매화나무 기둥[주간: 主幹]에 석회유를 발라 놓은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팡허팅 매원. |
팡허팅 매원에 심어진 매화나무 줄기에는 땅바닥에서 약 50cm 높이까지 석회유(산화칼슘:생석회: CaO 용액)를 발라 놓았다. 토양에 칼슘을 보충해주고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Photo>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 매원과 루쉰 좌상. Beautiful plum (meihua, ume) blossom and a statue of Luxun who was the most famous writer in modern China. |
방학정 입구엔 근세 중국의 대표적 문장가 루쉰(魯迅, Luxun, 1881 ∼ 1936)의 좌상이 보인다. 루쉰의 본명은 조우슈런(周樹人, Chou Shu Ren)이다. <photo>루쉰은 항조우에서 약 70 km 떨어진 샤오싱(소흥, Shaoxing)에서 태어났으며 지금도 샤오싱에는 루쉰 고거가 남아 있다. 팡허팅 주변 고산공원(孤山公園, Gusan Park)에 약 400 여 그루의 매화나무 여러 품종이 자라고 있다. 아침 최저 기온 8도 낮 최고 기온 16도로 포근한 탓인지, 2월 하순인데도 만개 시기가 이미 다소 지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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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매화와 학을 가장 사랑한 북송시대의 은둔 시인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처사의 묘소. Tomb of Lin Hejing who was the Northern Song poet and loved maehwa (meihua, ume) and crane. Fang He Ting (Crane Pavilion), Gusan(Solitary Hill). Xihu (West Lake), Hangzhou, Zhejia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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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 바로 뒤에 위치한 임화정처사의 묘는 너무나 소박하고 조촐하였다. 중국에서 비석을 세웠다 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임화정처사의 비석은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비문조차 없다. "임화정처사지묘 (林和靖 處士之墓)" 일곱 자뿐이다. 정말로 세상 명리를 멀리하고 살다간 처사의 비석다웠다. 비문이 없어도 아는 사람은 모두 다 그 사람됨을 잘 안다. 사실 봉분과 비석이 크다거나 묘갈명을 장황하게 지었다고 훌륭한 인물로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허욕에 지나지 않는다. 임화정 처사의 자(字)는 군복(君復)이고 본명은 임포(林逋, Lin Bu)이다. 서기 967년 항조우에서 태어났으며, 1028년 고산에서 작고할 때 까지 일평생 결혼하지 아니하고[불취무자(不娶無子)] 벼슬도 하지 않았다. 고산에서 20여년간 은둔해 살면서 "시를 읊고 글을 지으며[음시작서(吟詩作書)],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며[식매방학(植梅放鶴)]" 살았기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 불렸고 사후 "화정(和靖) 선생"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임화정집(林和靖集)》이 세상에 전해오고 있다. 원나라 때 양연진(楊璉眞)이라는 스님이 그의 묘를 파보니 단계석 벼루[단연(端硯)] 하나와 옥비녀[옥잠(玉簪)]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다. 현재의 묘는 1964년 문화혁명 때 훼손된 것을 1987년 중수한 것이다. 린위탕(임어당:林語堂)은 《생활의 발견》에서 "주렴계(周濂溪:周惇頤, Zhoudunyi, 1017~1073)를 연꽃의 임물, 도연명(陶淵明, Taoyuanming, 365-427)을 국화의 인물, 임화정을 매화의 인물"이라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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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시후 구샨 팡허팅. Fang He Ting (Crane Pavilion), Gusan(Solitary Hill). Xihu (West Lake), Hangzhou, Zhejiang, China. |
구샨(고산)은 서호에서 가장 큰 섬이고 높이는 불과 해발 38미터 밖에 안된다. 임화정처사가 살던 옛 집터에 원나라 때 진자안(陳子安 , Chen Zian)이 학정(鶴亭)을 지었다가 명나라 때 전당(錢塘, Qiantang) 현령이었던 왕익(王釴, Wang Yi)이 방학정을 지었고 1915년 현재의 정자로 중건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곳을 매림귀학(梅林歸鶴)의 명소라 일컫는다. 임화정 처사의 묘는 방학정 뒷편에 있다. 방학정 기둥에 걸린 편액에는 다음과 같이 연작으로 된 시귀가 적혀 있다.
世無遺學香能隱, 山有名花鶴不孤. 梅花已老亭空鶴, 處士長留山不孤
세무유학향능은 산유명화학불고 매화이로정공학 처사장유산불고
<번역>
세상에 남긴 학문은 없으나 향기 능히 숨어 있네, 산에 이름난 꽃이 있어 학은 외롭지 않구나. 매화 이미 지고 정자엔 학이 보이질 않네, 처사가 오랫동안 머물러 산은 외롭지 않구나.
또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편액도 있다.
華表千年遺蛻 可聞玄鶴語 孤山一角暗香 先返玉梅魂
화표천년유세 가문현학어 고산일각암향 선반옥매혼
<번역>
화표(화표는 무덤을 의미함) 천년이 남긴 유적에서 검은 학의 이야기 들을 수 있네 고산 일대에 감도는 그윽한 향기속에 옥 같은 매화의 넋이 돌아오네
매화는 식물이요 학은 동물이지만 고결한 품격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예로부터 학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이며 고결한 품격의 선금(仙禽)으로 여겨왔다. 학은 물가에 놀아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므로 옛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학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올곧게 닦은 도인이나 신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하였다. 화정처사는 세상 명리를 멀리하고 오직 매화와 학과 더불어 생활하였으니 정말로 고결한 신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니 모두가 "서호 신선"이라 하지 않았는가! 명나라 시인 고득양(高得楊)이 "고산제설(孤山霽雪)"이라는 시를 쓴 이래 고산제설은 신서호십경(新西湖十景)의 하나로 겨울철 서호의 대표적 경관이 되었다. 수많은 문객들이 이곳을 유람하며 글을 남겼다. 참고로 "학비거혜 ...<중략>...학귀래혜 (鶴飛去兮...鶴歸來兮)"라는 방학초학지가(放鶴招鶴之歌)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동파 소식(東坡 蘇軾, Dong Po, Su Shih)이 지은 「방학정기(放鶴亭記)」는 서호의 방학정이 아니라 지앙쑤셩(江蘇省) 쉬조우(徐州) 운룡산 방학정(雲龍山 放鶴亭)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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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매화와 학을 가장 사랑한 북송시대의 은둔 시인 임화정 처사의 방학정 현판. Fang He Ting (Crane Pavilion) |
방학정 현판 배경에 매화와 학이 엷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현판 글씨는 양학낙(楊學洛)이 썼다. 그 아래에는 서호풍경구 일대에서 가장 큰 무학부(舞鶴賦, wu he fu, dangcing crane) 각석이 보인다. 각석의 높이는 2.4m 가로 길이는 2.94m 이다. 전체 542자로 지어진 무학부는 남조(南朝) 문학가인 포조(鮑照, Bao Zhao, ?~466)의 작품이다. 서각 글씨는 명(明)대 서법가인 동기창(董其昌, Dong Qichang, 1555—1636,자는 玄宰,호는 향광:香光 또는 사백:思白)이 학이 날아가는 듯한 신필로 쓴 글씨<photo>를 청나라 강희황제(康熙皇帝, Qing Emperor Kang Xi, 1654-1722) 행궁을 위하여 돌에 각했다고 한다.
포조의 무학부 본문은 다음과 같다.
散幽經以驗物,偉胎化之仙禽。鐘浮曠之藻質,抱清迥之明心。指蓬壺而翻翰,望昆閬而揚音。澘日域以回騖,窮天步而高尋。踐神區其既遠,積靈祀而方多。精含丹而星曜,頂凝紫而煙華。引員吭之纖婉,頓修趾之洪姱。疊霜毛而弄影,振玉羽而臨霞。朝戲于芝田,夕飲乎瑤池。厭江海而游澤,掩云羅而見羈。去帝鄉之岑寂,歸人寰之喧卑。歲崢嶸而愁暮,心惆悵而哀離。
于是窮陰殺節,急景凋年。骫沙振野,箕風動天。嚴嚴苦霧,皎皎悲泉。冰塞長河,雪滿群山。既而氛昏夜歇,景物澄廓。星翻漢回,曉月將落。感寒雞之早晨,憐霜雁之違漠。臨驚風之蕭條,對流光之照灼。唳清響于丹墀,舞飛容于金閣。始連軒以鳳蹌,終宛轉而龍躍。躑躅徘徊,振迅騰摧。驚身蓬集,矯翅雪飛。離綱別赴,合緒相依。將興中止,若往而歸。颯沓矜顧,遷延遲暮。逸翮后塵,翱翥先路。指會規翔,臨岐矩步。態有遺妍,貌無停趣。奔機逗節,角睞分形。長揚緩騖,并翼連聲。輕跡凌亂,浮影交橫。眾變繁姿,參差洊密。煙交霧凝,若無毛質。風去雨還,不可談悉。既散魂而蕩目,迷不知其所之。忽星離而云罷,整神容而自持。仰天居之崇絕,更惆悵以驚思。
當是時也,燕姬色沮,巴童心恥。巾拂兩停,丸劍雙止。雖邯鄲其敢倫,豈陽阿之能擬。入衛國而乘軒,出吳都而傾市。守馴養于千齡,結長悲于萬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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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서호 낙조, 중국 저지앙셩 항조우 Sunset in Xihu (West Lake). Hangzhou, Zhejiang, China. |
항조우(항저우, 항주:杭州)는 중국 7대 고도의 하나다. 춘추 시대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그리고 남송(南宋, 1127-1280)의 도읍지였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항조우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격찬하였다.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는 말도 있다.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지상에 쑤조우(蘇州)-항조우가 있어 "인간천당"이라는 자랑이다.
서호는 원래 무림수(武林水) 또는 전당호(錢塘湖)라 불리었다. 소동파의 시귀에 나오는 "욕파서호비서자(欲把西湖比西子)"라는 데서 "서자호"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항조우 시내로부터 서쪽에 있어 서호라 부르기도 하고 그 여성적인 경치는 절세의 미녀, 서시(西施, Xi Shi, 이름은 이광:夷光)에 견주어 서시호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시와 관련하여 효빈(效嚬)과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전해온다. 춘추 시대 말엽(B.C. 496), 월왕(越王, Yue Wang) 구천(勾踐, Goujian, ?-BC465)과 오왕(吳王 Wu Wang) 합려(闔閭, Helü ?~BC 496)의 전쟁에서 합려는 적의 화살에 부상당한 손가락의 상처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 Fu Cha, ?~BC473)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하였다. 고소(姑蘇: 현재의 쑤저우:蘇州)에서 풀섶에 누워 자며[와신(臥薪)] 절치부심하던 부차는 병법전략가였던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으로 복수하였다.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부차에게 패한 월나라 구천은 소흥(紹興, 샤오싱)에서 쓰디 쓴 쓸개를 가까이 두고 맛보며[상담(嚐膽)], 군사력을 키우며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구천의 충신이었던 범려(范蠡, Fan Li )는 부차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하여 미인계를 써서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눈부신 미모에 현혹되어 국사를 태만히 하여 결국 구천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치욕을 잊지 않고 복수하기 위하여 풀섶에 누워 잠잔 부차와 쓰디 쓴 쓸개를 가까이 두고 맛본 구천의 일화로부터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그런데 서시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으므로 그 마을의 추녀들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이와 같이 무턱대고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효빈(效嚬) 또는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 부른다. 이태백(李白, Li Bai)은 서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姑蘇臺上烏棲時 吳王宮裏醉西施 吳歌楚舞歡未畢 靑山猶銜半邊日 銀箭金壺漏水多 起看秋月墜江波 東方漸高奈樂何
고소대상오서시 오왕궁리취서시 오가초무환미필 청산유형반변일 은전금호누수다 기간추월타강파 동방점고내락하
<번역> 고소대(고소는 쑤조우: 蘇州의 옛 이름) 위에 까마귀 깃들 적 오왕(부차)은 궁중에서 서시에 취하였네 오나라 노래와 초나라 춤으로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푸른 산에 어느 덧 지는 해가 반쯤 기울었네 은 바늘통과 금 항아리 새어나간 물 많았고 일어나 가을달 바라보니 강물 속에 빠져 있었네 동녘 어느새 밝았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한(漢) 원제(元帝) 시대의(BC 33) 왕소군(王昭君 Wang Zhao Jun),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呂布, Lu Bu)와 동탁(董 卓, Dong Zhuo ) 사이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인 초선(貂蟬, Jiao Chan), 당나라 현종시대의 양귀비(楊貴妃,Yang Gui-Fei, 본명은 양옥환, 楊玉環, Yang Yu Han)와 더불어 서시는 중국의 4대미인으로 손꼽힌다.
서호는 면적이 5.6㎢, 둘레가 15㎞인 타원형 호수로 평균 수심은 1.8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 된다. 서호 십경(西湖十景, Xi Fu Shi Jing) 중 하나인 단교잔설(斷橋殘雪, Remnant Snow on the Broken Bridge)과 고산은 낙천 백거이(樂天 白居易, Bai Juyi, 772~846)가 건설한 백제(白提, Baidi, Bai causeway)를 따라 이어져 낙조 풍광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고산의 관매(觀梅)는 당송시대부터 유명하였다. 원굉도 (袁宏道)는 「서호」라는 고문에서 "서호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이른 봄 초승달이고 하루중에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이른 아침 안개와 초저녁 놀의 먼 산 빛 [서호최성초춘초월 일일지성초조연초석람(西湖最盛初春初月 一日之盛 初朝煙初夕嵐)]" 이라 하였다. 서호십경은 단교잔설, 평호추월(平湖秋月, autumn moon on calm lake), 곡원풍하(曲院風荷, lotus in the breeze at crooked courtyard), 소제춘효(蘇堤春曉, spring dawn at Su causeway), 삼담인월(三潭印月, three pools mirroring the moon), 화항관어(花港觀漁, viewing fish at flowers harbour), 남병만종(南屛晩鐘, night bell at Nanping hill), 뇌봉석조(雷峰夕照, sunset glow over Lei hill), 유랑문앵(柳浪聞鶯, listening to orioles singing in the willow), 보석류하(寶石流霞, diamond hill under the evening sunlight), 황룡토취(黃龍吐翠, yellow dragon cave)의 경치를 말한다. 신서호십경은 육교연류(六橋煙柳), 서호월야(西湖月夜), 고산제설(孤山霽雪), 양봉백운(兩峰白雲), 갈령조돈(葛嶺朝暾), 북관야시(北關夜市), 구리운송(九里雲松), 절강추도(浙江秋濤), 냉천원소(冷泉猿嘯), 영석초가(靈石樵歌)를 일컫는다. 루쉰은 1924년「재론뇌봉탑적도도(再論雷峰塔的倒掉)」라는 글에서 중국인들의 "십경병(十景病)"을 언급하고 있다. "과자에 십명과(十銘菓)가 있고 요리에는 십품(十品)이 있고 음악에는 십번, 염마청에는 십전(十殿), 약에는 십전대보탕, 손놀이 유희에는 전복수(全福手), 남의 죄악을 손꼽을 때도 십조목을 들춘다"고 하였다. 그리고 뇌봉(雷峰, Leifeng)이 무너져 버린 사건을 놓고 "파괴가 없으면 새로운 건설도 없다"고 풍자하면서 뇌봉탑 밑에 갇힌 백사 낭낭(白蛇 娘娘)과 허선의 전설을 소개하고는 "유쾌한 기분"이라 하였다. 뇌봉탑이 무너진 원인은 탑돌을 집안에 두면 소원성취할 수 있고 평안해 진다는 미신이 농민들 사이에 퍼져 하나둘씩 탑돌을 빼내가서 무너져 내렸단다. 또한 「홀연상도(忽然想到)」라는 루쉰의 글에는 "만리장성은 벌써 옛날에 폐물이 되었다"고 단정하면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모택동(毛擇東, Mao Ze Dong)이 "만리장성을 밟아보지 않고는 남자라 할 수 없다 [부도장성 비호한(不到長城非好漢)]"라고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루쉰은 전통유적을 가볍게 보았다.
고산의 서냉교(西冷橋) 부근에는 추근(秋瑾, Qui Jing, 1875~1907)의 묘<photo>도 있다. 추근은 항조우에서 약 70 km 떨어진 샤오싱(소흥, Shaoxing) 출신으로 추근의 고거<photo>가 샤오싱에 남아 있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난 추근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개화기 여성 혁명활동을 하다 <photo>가 체포되어 "가을 비바람 근심속에 죽는 사람[추풍추우수살인(秋風秋雨愁煞人)]"이라는 7자의 절명글을 남기고 1907년 처형되었다. 서냉교 부근에서 소제(蘇提 Sudi) 쪽을 바라보면 정말로 아름다운 경치를 맛볼 수 있다. 서냉교 건너 서북쪽으로 곡원풍하(曲院風荷, Qu Yuan Feng He)와 악묘(岳廟, YueMiao)가 있다. 악묘는 악비(岳飛, Yue Fei, 1103~1142) 장군의 묘가 있는 사당이다 <photo>. 악묘의 악비장군 좌상 뒤에는 <환아하산(還我河山)>이라는 친필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 북송(北宋) 왕조(960-1127)의 황제였 던 휘종(徽宗)은 정치적 능력이 없어 간신배들 농간에 놀아나 향락을 일삼다가 여진이 세운 금(金)나라의 침략을 받아 그의 아들 흠종(欽宗)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나라도 망하였다. 휘종의 아들 중 한 사람인 고종이 남쪽 항조우로 도망하여 재건한 나라가 남송(南宋)이다. 악비는 하남성 탐음현의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불굴의 투지와 뛰어난 군사전략을 지녔다. 북송에서 도망하지 않고 금나라에 항전한 종택(宗澤)의 휘하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악비는 종택과 군진을 의논하면서 "진을 쳐놓고 싸우는 건 전술의 상식이지만 그 진을 운용하는 묘는 마음 하나에 달려있다[진이후전 병법지상 운용지묘 존호일심 (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운용지묘라는 고사성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남송 초 금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악비 등의 주전론과 당시 재상이었던 진회(秦檜, Chin Quai)와 그의 부인 왕씨(王氏, Wang Su), 만후설(万侯卨, Ban Aen Gual), 장준(張俊, Chang Juin) 등의 강화론이 팽팽히 맞섰다. 악비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금나라 군대를 여러차례 격파하면서 '중원 복귀, 송조 부흥'이라는 정충보국(精忠報國)에 불타고 있었다. 불리해 가는 정세를 예견한 금나라의 올출(兀朮)은 우선 장병가족들을 황하 북쪽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고 "태산을 요동시키기는 쉬워도 악비 군대를 동요시키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악비의 군대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 잔뜩 겁을 먹은 남송의 고종과 진회 일파는 악비의 승리가 도리어 강화를 어렵게 한다고 판단하고, 악비를 제거하려고 모함하였다. "악비를 죽여야 화친할 수 있다"는 금나라의 교묘한 화친 조건도 있어, 진회는 악비에게 상을 준다고 하여 조정으로 소환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금나라 인사들과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악비의 자백을 강요했다. 자신을 죽일 것임을 직감한 악비는 침묵하였다. 물적 증거를 잡지 못한 진회는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수유(莫須有)"의 세 글자로 거짓 죄명을 만들어 1141년 39세의 악비를 독살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진회 일파 네사람의 철상(鐵像)<photo>을 만들어 악비장군의 무덤 <photo>과 그의 아들 악운(岳云)의 무덤 앞 좌우에 무릎을 꿇게함으로써 반역자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에 젖은 반역자들의 철상은 목불인견이었다. 철상 뒤에는 챔배객들에게 "문명유람을 위하여 침을 밷지 마시오[문명유람칭물토담 (文明游覽請勿吐痰)]"라고 써 놓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멸의 침을 밷고 있었다.
악비장군은 죽은 후 악왕(岳王)으로 봉해지고 무목(武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악묘는 송나라 가경14년(서기1221)에 세워졌다. 그는 무장이었지만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다. 중국에서는 만세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는데 최근 소수민족 분열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다소 수그러든 느낌이 있다.
악묘에 피어난 매화는 악비장군의 벽혈단심(碧血丹心)과 충절을 대변하면서 봄을 재촉하는 비에 젖고 있었다.<photo> 나는 "막등한(莫等閒)"이라는 글귀로 유명한「만강홍(滿江紅)」을 떠올리며 비내리는 악묘를 떠났다.
怒髮衝冠,感闌處﹑瀟瀟雨歇。抬望眼,仰天長嘯,壯懷激烈。 三十功名塵與土,八千里路雲和月。 莫等閒,白了少年頭,空悲切。 靖康恥,猶未雪;臣子恨,何時滅! 駕長車﹑踏破賀蘭山缺。壯志飢餐胡虜肉,笑談渴飲匈奴血。 待從頭﹑收拾舊山河,朝天闕。
노발충관, 감란처, 소소우갈. 태망안, 앙천장소, 장회격렬. 삼십공명진여토, 팔천리로운화월. 막등한, 백료소년두, 공비절. 정강치, 유미설. 신자한, 하시멸. 가장거, 답파하란산결. 장지기찬호로육, 소담갈음흉노혈. 대종두, 수습구산하, 조천각.
<번역> 성난 머리칼 관을 찌르고 난간에 기대서니 부슬 부슬 내리던 비도 그치는구나. 치켜뜬 눈빛 하늘을 우러러 길게 포효하니 장사의 가슴에 피가 끓는구나. (빼앗긴 옛 땅을 수복하려는) 삼십년 공명은 흙 먼지가 되고 팔천리 전선길 구름과 달빛 뿐이구나. 한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거늘 소년의 머리가 희어졌으니 공허와 슬픔으로 찢어지는구나. 나라가 망한 치욕을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의 한을 어느 때 풀 수 있으랴! 전선의 수레를 몰아 가란산 허점 뚫어 돌파하리니 장사의 굳은 마음 오랭캐 살로 주린 배 채우고 오랭캐 피로 마른 목 추기며 웃음얘기 나누리라. 선두에 서서 빼앗긴 산하를 수복한 후 임금님 계신 궁궐에서 조회하리라.
악묘를 지나 서북쪽으로 가면 <photo> 영은사(靈隱寺, Ling Yin Si)가 있고 비래봉(飛來峰) 석굴에는 조상(造像)이 많으며 옥액유란(玉液幽蘭, You Ye You Lan)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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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명재상 송경(宋璟)의 매화부(梅花賦) |
당나라 현종(玄宗)때 명 재상이던 송경(宋璟, 663~737)은 매화를 좋아하여 25세에 <매화부>라는 걸작을 지었다. 허베이셩 싱타이시(河北省邢台市, Xingtai city, Hebei province) 남쪽 7km지점에 명(明)나라 정덕(正德)년간에 건립된 "매화정"이 있고 건륭어서 매화석각(乾隆御書梅花石刻)이 있다.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이 지은 「설매헌부(雪梅軒賦)」에는 "송경의 매화부는 ...... 천추에 뛰어났다. 시인들이 보고 입 다물고 못 떠들며, 문인들이 듣고 잠잠한 채 속만 태울 뿐"이라는 구절이 있다. 송경의 매화부는 모두 560자로 되어 있고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垂拱三年,余春秋二十有五。战艺再北,随从父之东川授馆舍。时病连月,顾瞻危垣,有梅花一本,敷葩于榛莽中。喟然叹曰:“呜呼斯梅!托非其所出群之姿,何以别乎?若其贞心不改,是则足取也已!”感而乘兴,遂作赋曰: 高斋寥阒,岁晏山深,景翳翳以斜度,风悄悄而乱吟。坐穷檐而后无朋,进一觞以孤斟。步前除以彳亍,荷藜杖于墙阴。蔚有寒梅,谁其封植?未绿叶而先葩,发青枝于宿枿,擢秀敷荣,冰玉一色。胡杂遝乎众草,又芜没于丛棘,匪王孙之见知,羌洁白其何极?! 若夫琼英缀雪,绛萼著霜,俨如傅粉,是谓何郎;清馨潜袭,疏蕊暗臭,又如窃香,是谓韩寿;冻雨晚湿,宿露朝滋,又如英皇泣于九嶷;爱日烘晴,明蟾照夜,又如神人来自古射;烟晦晨昏,阴霾昼闭,又如通德掩袖拥髻;狂飙卷沙,飘素摧柔,又如绿珠轻身坠楼。半开半合,非默非言,温伯雪子,目击道存;或俯或仰,匪笑匪怒,东郭顺子,正容物悟。或憔悴若灵均,或歆傲若曼倩,妩媚若文君,或轻盈若飞燕,口吻雌黄,拟议殆遍。 彼其艺兰兮九畹,采蕙兮五柞,缉之以芙蓉,赠之以芍药,玩小山之丛桂,掇芳洲之杜若,是皆出于地产之奇,名著于风人之托。然而艳于春者,望秋先零;盛于夏者,未冬已萎。或朝开而速谢,或夕秀而遄衰。曷若兹卉,岁寒特妍,冰凝霜冱,擅美专权?相彼百花,孰敢争先!莺语方蛰,蜂房未喧,独步早春,自全其天。 至若托迹隐深,寓形幽绝,耻邻市廛,甘遯岩穴。江仆射之孤灯,向寂不怨栖迟;陶彭泽之三径,投闲曾无悁结。贵不移于本性,方有俪于君子之节。聊染翰以寄怀,用垂示于来哲。 从父见而勗之曰:“万木僵仆,梅英载吐;玉立冰洁,不易厥素;子善体物,永保贞固”!
매화부에 표현된 "이른 봄을 홀로 걸어 스스로 하늘을 뒤덮는다[독보조춘 자전기천(獨步早春 自全其天)]"라는 귀절과 "그 본성을 바꾸지 아니하여 군자의 절개를 지녔다[귀불이우본성 방유여우군자지절(貴不移于本性 方有儷于君子之節)]"는 귀절이 시인묵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동풍제일지(東風第一枝)라 하여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전령이 매화이다. 엄동 추위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른 봄을 홀로 걷는[불외엄한 독보조춘(不畏嚴寒 獨步早春)] 매화의 쟁쟁철골 호연정기(錚錚鐵骨、浩然正氣) 정신이 바로 중국인들의 혼이라 말하기도 한다. 매화는 괘락, 행운, 장수, 순리 화평을 가리키는 오복(五福)의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또한 "초생예위원 개화위형 결자위이 성숙위정(初生蕊爲元 開花爲亨 結子爲利 成熟爲貞)"의 사덕(四德)을 갖추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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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Photo> 동파육 (東坡肉, Dongporou ) |
항조우 서호 인근에 위치한 망후반점(望湖飯店, Wanghu hotel) 내 식당의 동파육 요리사진이다. 돼지고기로 요리한 장조림과 비슷하며 비교적 달고 향기로우나 기름기가 많다.
항조우의 대표적 요리로 시후초어, 용정하인, 동파육이 유명하다. 시후초어는 서호에서 잡은 생선에 달고 신 양념장을 넣은 요리이고 용정하인은 항조우 서남쪽 교외에 있는 룽징(龍井)<photo>의 명산인 차잎을 넣어 조리한 새우요리다. 동파육은 소동파와 관련된 고사가 전해오는 돼지고기 요리다. 소동파가 항조우 지사를 역임하면서 시후를 준설하여 제방을 쌓아 주변의 논밭에 관개의 혜택을 주어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오늘날에도 서호에 남아 있는 이 제방은 소제(蘇提 Sudi)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소제춘효가 서호 10경 중 하나이다. 어느 해 풍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이 서호 준설에 감사하여 돼지와 술을 들고 세배를 왔다. 이후 소동파가 다시 돼지고기를 사각형 덩어리로 삶아 술과 함께 서호 제방을 쌓던 인부들 집집마다 고기를 보내 새해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부인이 조리를 할 때 "술과 함께 전하다(連酒一起送)"를 " 술과 함께 삶다(連酒一起燒)"로 잘못 알아 듣고 요리하였다. 이 때 뜻밖에 만들어진 고기가 더욱 향기롭고 맛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소동파가 인부들을 잊지 않은 것을 보고 더욱 감동하여 그를 더욱 존경하였고 그가 전해준 고기를 동파육(東坡肉, Dongporou )이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거지닭>으로 소개된 찌아오화통즈(규화동계 叫化童鷄, Jiao hua tongji)도 유명하다. <photo> 사진은 악묘(岳廟, YueMiao) 정문 앞 악왕루(王岳樓)의 요리다. 어떤 거지가 저녁에 몰래 닭서리를 하다가 순시나온 수령하인에게 들켜 닭을 연못의 연잎에 싸서 진흙바닥 속에 감추었다 나중에 진흙채로 구워 먹으려 했다. 하인이 그 닭을 진흙에 발라 구워서 수령에게 바치니 별미여서 이러한 요리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름이 특이하나 음식 모양이 정갈해 보이지 않고 손에 닭기름 뭍여가며 먹은 것에 비해 맛은 그렇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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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photo> 룽징 중국차 박물관(龍井 中國茶汁博物館) China Tea Museum, Lungjing Rd, Hangzhou, Ch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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