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눈치 보고 막고 있는 겁니다” <정형근: 후보자는 1983년 10월 아웅산 폭탄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북한 공작원 강민철이 수감 중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본 위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강민철이 한국의 관계기관에 전향(轉向)의사를 표시했으며 한국으로의 송환을 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듣고 있습니다. 정형근: 듣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정형근: 국정원은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면회 등 강민철과 접촉한 내용 및 시기에 대해 외교상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접촉한 사실을, 말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요, 밝힐 수 없습니까? 김만복: 아닙니다.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강민철과 접촉한 일이 없다고요? 김만복: 예. 정형근: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僞證罪) 됩니다. 김만복: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형근: 확실히 없습니까? 김만복: 그것을 제가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정형근: 아니, 본인이 모릅니까? 보고받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만복: 지금 대답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정형근: 아니, 밝힐 수 없다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면회를 했어요. 면회를 했는데, 지금 오려고 그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김만복: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북한은 남쪽이 했다고 그렇게 주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형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김만복: 그러니까 그 주동자를 남쪽이 데리고 오면 ‘봐라, 너희들이 시킨 사람 이제 너희들이 너희 나라로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라고 북한이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형근: 그것은 말이 안되지요. (미얀마 정부가) 조사를 해 가지고 단교까지 한 사례인데, 그것을 안 데려온다면 말이 안되고요.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 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 의문의 죽음 2007년 미얀마와 북한이 국교를 복원하기 직전 이상한 기사가 국내 언론에 실렸다. ‘북한 공작원 강민철씨가 최근 북한과 미얀마 사이 외교관계 복원 가능성이 엿보이는 상황에서 자신은 남북한 어느 곳에도 가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외신이 보도했다’(한겨레)는 것이다. 연합뉴스는, 미얀마와 동남아 일대 뉴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이라와디>가 4월 23일 수도 양곤의 인세인 교도소에서 강씨와 같이 생활했던 한 정치범의 말을 따서 “강씨가 지금은 미얀마 언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안다”면서 “그는 지금 남북한 어디에도 가기 싫어하고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강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배신자로 간주할 것이고, 한국으로 가면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죄로 법정에 회부될 가능성이 있어 가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이라와디>는 덧붙였다. 이는 강민철이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나서 한 이야기와 다르다. 강씨가 미얀마-북한 복교(復交)를 앞두고 태도를 바꾼 것인지, 만들어진 기사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행을 바라던 강씨로선 미얀마-북한의 관계
개선은 암담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2008년 5월 AP통신은 미얀마(버마) 수감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이던 강민철이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이 관계자는 강씨가 미얀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최장(最長)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肝)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 전에 강민철을 면담한 한국측 인사는 그의 건강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했었다. 중병(重病)에 걸렸더라도 한국 정부가 나서서 그를 데리고 왔더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송환촉구 청원인들이, ‘북한은 강민철에 대해 위해를 가할 가능성도 예상되는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조기송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한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국가적, 인도적 차원에서 정부는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왔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17명의 원혼(魂)에 대한 국가의 의무이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예의였다. 김정일이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전사(戰死)한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인(人)1조(組)의 조장(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조원(組員)은 강민철(옥사·獄死),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애국(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 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 만인 9월 17일 오후 미얀마 양곤 항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린 세 공작원은 주(駐)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폭파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 날 새벽 세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탄 세 개를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작업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殺傷)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30분쯤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당시 랑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 외교사절단은 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미얀마 외무장관이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분 늦게 묘소로 출발하였다. 주미얀마 한국 대사 이계철씨가 탄 벤츠차(車)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렸다. 이 차에 대통령이 탔다고 오판(誤判)한 것은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북한공작원 세 명이었다. 대사 차가 지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묘소에서 울려 퍼졌다. 북한 공작원은 참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한국 정부의 장·차관급 엘리트 관료 및 취재기자 등 17명이 죽었다. 범행 직후 북한소행이라고 단정한 全 대통령 오전 11시쯤 우산유 미얀마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의 숙소로 달려왔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범행을
북한소행으로 단정하였다. 대화록에 의하면 이렇다. “이 테러행위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파괴공작의 일환이며 한국, 버마 두 나라의 관계를 갈라 놓으려는 폭력사태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취지가 버마(당시 國名) 정부가 발표할 성명서에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우산유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심증(心證)을 재차 강조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복(顚覆)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PU(국제의원연맹) 총회를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수법으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미얀마 군부(軍部)의 실력자 네윈 의장이 사죄차 방문하였다. 네윈 의장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보국에서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호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책임자가 제대로 체크를 못한 듯합니다. 사건은 내부 소행일 수도 있고 외부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네윈에게도 북한소행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사에 참고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대치 상황은 의장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울 만큼 긴장이 고조돼 있습니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된 IPU 총회에 대해 온갖 방해공작을 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총회 개최 10일 전에 대구 미(美)문화원 폭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수법이 오늘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사건도 북한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윈 의장은 오히려 미얀마 내부 사정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범죄자를 꼭 잡아낼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한 파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서 긴급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는 물증(物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으로서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직전에 있었던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고 사용한 폭발물에 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웅산 테러의 상황과 연결시켜 범인을 적중시킨 예언을 한 셈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1사단장일 때
제3땅굴을 발견하였다. [1983년 9월 22일 밤 9시33분경 대구시 삼덕동2가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생인 허병철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대구 중부경찰서 김철호 순경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1983년 12월 8일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북한 공작원 전충남과 이상규에 의하여
북한소행임이 확인되었다.] 天佑神助로 잡힌 두 범인들
아웅산 테러 희생자 영결식장에서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눈을 감은 채 두 아들 한회,
승회 군의 손을 잡고 있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의 주범이 김정일로 밝혀진 것은 민족반역적 범죄에 대한 천벌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적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란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리라. 10월 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북한 공작원 세 사람은 항구로 가서 북한 선박 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일단 흩어졌다. 조장 진모는 10월 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목숨이 붙어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내려가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둘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달아났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 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아래 팔이 날아갔으나 목숨은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사형이
유보되었다. 고등학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잘못한 부분은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북한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축소, 왜곡, 비호하는 내용이 많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과 아웅산 사건을 다루지 않은 교과서가 태반이다. (주)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기술은 했으나 표현이 애매하다. <남북한의 관계는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였을 때, 수도 랑군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폭발사고로 각료를 포함한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발사건 역시 남북한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웅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범인이 북한정권임을 애써 감춘 기술(記述)이다. 이 내용만 읽어선 누가 범인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사건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쓰고 있다. 이 두 사건이 터졌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늘의 고교생들이 이 글을 읽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더구나 ‘아웅산 폭파사건’이라고 해야 테러라는 느낌이 들 터인데, ‘폭발사고’라 표현하니 가스폭발사고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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