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가 입수한 ‘현대중국연구 3호(2000년)’에 실린 논문 요약본에 따르면 1949년과 50년 두 차례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는 김일성의 6·25전쟁 계획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당시 마오는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약 7만 명 수준의 일본 지상군 을 파병할 것이며 절대 본국에서 미군을 차출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했다고 추이 박사는 주장했다. 일본 지상군과 한국군 정도는 중국이 인해전술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전쟁 준비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적잖은 순풍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추이 박사는 논문에서 시종 북한의 남침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전제한 뒤 논리를 전개했다. 추이는 “중국이 이 전쟁에 일찌감치, 그것도 매우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에 임박해서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역할 분담이 결정됐지만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참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주더 총사령관(左), 브루스 커밍스(右)
50년 2월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주덕)는 만주까지 행군하던 인민해방군 42사단이 베이징을 경유할 때 만나 “한편으론 생산건설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참전할 때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압록강을 건넌 것을 두고 서방 학계 일각에서는 갑작스럽게
중공군의 참전이 결정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추이 박사는 이는 스탈린과 마오 사이의 불신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한다. 중공군이 확실히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뒤 소련의 무기 지급이 이뤄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스탈린이 중국의 국공(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때 장제스(將介石·장개석), 펑위상(馮玉祥·풍옥상·군벌 총사령관), 마오에게 무기 등 군사적 지원을 해주고도 한 차례씩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 때문에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6·25전쟁에서 명령의 시달자이면서 북한과 중국을 조종하고 훈련시키는 교관이었다고 추이 박사는 판단했다.
추이는 대만 탈환이라는 공산당 차원의 역사적 사명을 뒤로 하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중공군이 뛰어든 주요인을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에서 찾았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이후 줄곧 스탈린의 지원을 받았던 마오의 부채 의식도 참전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 2차 국공내전 과정에서 소련으로부터 결정적 군사 원조를 받은 마오로서는 이 빚을 털고 가지 않은 채 대만 상륙을 위한 소련의 해·공군 지원은 요원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만주에 진주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일대의 팔로군에게 소련의 최신식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했던 마오로서는 스탈린의 보복 가능성도 신경 쓰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당신이 나의 승패에 관심 없다면 나도 당신의 생사에 관심을 끊겠다”고 위협했다고 추이 박사는 지적했다.
논문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북한이 밀릴 경우 참전을 결심한 마오는 치밀하게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베이징의 공산당·군 수뇌부는 전쟁 발발 전인 50년 6월 22~26일 연일 회의를 소집했다. 전쟁을 전후로 한 국제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7월엔 일본 관동군이 쓰던 만주 일대의 31개 비행장 개·보수에 들어갔다. 추이 박사는 “이 정도 비행장 규모라면 미그기 2000여 대를 작전에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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