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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 <상><중>

淸山에 2011. 7. 31. 16:58

 

 

  

 

남북 사이에서 사라진 청춘 … 최인훈 ‘광장’ 속 명준 같은 삶
 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상>

라종일 전 국정원 차장 | 제228호 | 20110723 입력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의 아웅산 묘지 방문을 앞두고 북한 공작원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21명이 숨졌다. 사진은 폭발 직후 뼈대만 남긴 채 무너져 내린 건물. [중앙포토] 

2008년 5월 동포 한 사람이 머나먼 미얀마의 감옥에서 혼자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온몸에 부상을 입은 불구의 몸으로 투옥돼 하루 두 끼 식사로 연명하며 25년간이나 이어왔던 감옥 생활을 이로써 마감한 것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7000만 명의 한민족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한 고통 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의 곁에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모국의 언어로 마지막 말을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몸은 화장돼 재는 이국의 대기 속으로 흩어졌고 그가 세상에 살았던 흔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젊은이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해 부질없는 것이라고 외면하거나,
왜 상처를 다시 건드리냐고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한가지 부탁은 우선 이 이야기를 차분히 읽어봐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젊은이를 이상화하거나 낭만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젊은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28년 전 당시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터뜨려 수행 중이던 한국 정부 요인들을 무더기로
살상한 3인조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다.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조금만 차분한 마음으로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살펴본다면, 그만을 쉽게 단죄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를 그저 흉악한 죄인으로 단죄해 버리고, 모든 걸 그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리고, 그가 겪은 일들, 그의 가슴에 맺힌 사연에 관해서는 귀를 막아버려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이 젊은이의
비참한 운명에 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통일을 바란다면, 그리고 통일이 그저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사람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관해 심각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웅산 테러를 보도한 1983년 10월 9일자 중앙일보 호외. 
 
무엇보다 먼저 이 젊은이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테러를 자행했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은 거의 모든 정보가 차단된 곳이며,
일반 사람의 생각과 정서도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외부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있는 일반 테러범과는 다르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국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돼 있어 그는 자신의 행동에 관한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다.
 
듀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신을 비참한 처지에 빠뜨린 악인들에게 극적인 복수를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라면 이런 일은 좀처럼 이뤄질 수 없다. 죄 없는 사람을 지하 감옥에 처넣은 자들은 현실의 세상에선 온갖 명예를 누리고 후세에 그럴 듯한 이름까지 남겼을 것이다. 반면 에드몬드 단테스는 지하의 감옥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훨씬 더 많은 에드몬드 단테스를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 을 것이다.
 
세상에는 ‘지워진 사람들(the Erased)’이 있다. 1991년 동구권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슬로베니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비(非)슬로베니아 민족 가운데 영주권을 박탈당한 1만8000명에 이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워져’ 온 것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썼던 작가는 “이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들’이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생겨난다”고 말했다. 2008년 이국의 감옥에서 숨져간 북한의 한
특수부대원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지워졌다. 그러나 그가 겪은 고뇌와 외로움, 고통과 동경, 증오와 그리움은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가 한 인간을 얼마나 철저히 지워버릴 수 있는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주인공 ‘명준’은 결코 소설 속 인물이 아니고 수많은 ‘명준’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돼야 한다. 그게 내가 이 증언을 하는 이유다.
 
강민철의 본명은 강영철이다. 강민철은 북한의 주요 인사가 흔히 쓰는 가명(nom de guerre)이었다. 미얀마인들은 그들이 부르기 쉬운 방식으로 그를 강민추라고 공식 기록에 표기했다. 공식 기록에는 1955년 4월 18일생으로 돼 있지만
그는 사실은 57년 7월 29일생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원도 북방의 통천 출신으로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통천은 바닷가여서 교통 요지이면서 경치가 아름답다.
 
정주영 현대 회장 같은 유명 인사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해산물이 풍부해 살기가 넉넉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민철은 83년 10월 당시 버마라고 불리던 나라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중상을 입고 체포됐다. 대부분의 죄수가 20년 안에 사망한다는 ‘인세인’
 감옥에서 25년간 복역하다 2008년 5월 암으로 사망했다.
 
체포 당시 그는 온몸에 부상을 입어 왼쪽 팔은 절단되었고 얼굴, 오른쪽 어깨, 복부, 음랑, 양쪽 넓적다리 등 몸의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강민철은 고향에 3인의 가족이 있었다. 부친 강석준, 모친 김옥선 그리고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이 하나.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사이였고, 끝내 그는 숫총각으로 살고 죽은 셈이다. 북한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초등학교 4년과 중등학교 6년의 10년 과정을 졸업하고 군에 소집돼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학과나 운동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군 훈련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장교로 충원됐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학교 훈련생들은 전국에서 출신 성분이나 능력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다. 전투나 무술·사격 등에서 뛰어난 능력의 소지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서로 실명을 알지 못하도록 돼 있었다. 교육 중에는 남한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교과 과정도 있고 남한의 영화나 TV를 볼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살인적인 훈련이 있었다. 기초훈련은 야외에서 생존 기술, 장거리 강행군 훈련,
산악에서의 야간 활동 등이다. 처음에 35㎏의 모래를 담은 배낭을 지고 10㎞의 속보 강행군을 하는데 차츰 거리를 늘려 20㎞,
40㎞ 그리고 50㎞까지 강행군을 한다.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철인을 만든다. 남한에 침투한 요원 중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하거나 지휘관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적지(한국)에서 수많은 군경으로 포위된 상황을 돌파하고 휴전선을 넘어 귀환하는 요원들도 있었다.
 
훈련병 중에는 한 달여에 걸친 기초 훈련 과정에서 탈락해 퇴교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고된 훈련을 끝내면 하늘·땅·바다를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거의 만능의 전사가 된다. 혼자서 100t급 배를 운항할 수 있고, 전술 행동을 하면서 12마일을 수영할 수 있으며, 육지건 강이건 바다건 간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강을 따라 수영을 하거나 특별히 설계된 잠수정에 타거나 혹은 매달려서 적지에 침투하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집처럼 특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외의 특수기관에 관한 강의도 받았는데
이스라엘의 모사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강민철은 고된 훈련을 잘 이겨내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바로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군번은 9970이었다.
 
특수부대원으로 그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일반 군인이나 행정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수준의 보수 외에도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운 물품들의 특별 공급도 있었다. 부대에는 매월 기차 한 차량분의 특별 보급품이 전달되었다.
외출 때에도 실제 계급보다 높은 위장 신분증을 갖고 나갔다.
 
엄격한 규율과 고된 훈련, 그리고 어려운 특수 임무는 20대의 젊은 청년에게 시련이라기보다 보람 있는 도전이었다. 20대 중반에
강은 이미 장래가 보장된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가족에게는 자랑과 희망, 그리고 동네의 친구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 젊은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내몰았다. 83년 8월 그가 속한 ‘강창수 부대’의 지휘관인 강창수 중장은 3명의 장교를 불러들여 색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최고위층의 지시라고 했다. 선발된 그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강민철 대위였다.
 
 
 

 

 
 

갑자기 추진된 버마 방문 … 안기부선 북 테러 우려해 반대

[중앙선데이] 입력 2011.07.31 05:54

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중>

 
 
아웅산 폭파 테러 사건 하루 전인 1983년 10월 9일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길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특별기에 탑승하면서 환송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젊은이 박종철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를 고문한 두 경찰만 지적을 한 채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죽인 형제에 관하여 물으신 하느님에 대한 카인의 대답입니다. 야당들, 부모들, 교사들,
종교 지도자들 모두 한 젊은이의 잔인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학생, 박종철의 기념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

1980년대 초 한반도는 또다시 극적인 사태의 전개로 요동치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하고 급기야는 광주에서 대규모의 인명이 희생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민중의 기대를 억압하고 새롭게 집권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에 대한 저항은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분출했다. 그러나 세상의 표면에 일고 있는 소용돌이의 저변 깊은 곳에서는 더 큰 힘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그러나 조바심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은 조용히 항모를 포함한 기동함대를 보냈다.
 
80년대 초반 남한의 사태는 북한 정권의 지도부로서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남한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여건이 성숙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섣불리 무력을 사용하다가는 오히려 남한 내부의 반동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전과는 달리 미국의 항공모함은 초강대국의 개입 의사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부는 새로운 집권 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들끓고 있었고 특히 대통령은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감과 증오의 대상으로 되는 것 같았다. 이를 제거한다면 남한 정권을 약화시키고, ‘혁명적 여건’을 촉진시킬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적어도 남한의 일부 층에는 구원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광주 사태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폭력을 예정하고 있었다.
커다란 힘들이 움직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작은 인간들의 운명이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불과하다.
 
반기문 실장 ‘국화작전’ 명명

학원가를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거의 매일 계속되었지만, 광주 사태의 부담을 진 채 남한 사회는 안정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특히 경제가 회복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83년 남한 정부는 인도를 주안점으로 하는
대통령의 서남아시아  순방을 계획했는데 취지는 중립국가 외교였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이범석이 처음부터 자신의 인도 근무 경험을 기초로 계획을 주도했다. 방문 시기가 10월이어서 장관의 비서실장이던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이 그 계절 꽃의 이름을 따서 ‘국화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그 시절은 남북한 간에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인 세 다툼을 하던 때여서 이 순방계획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버마가 추가된 배경은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 청와대의 특별한 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외무부도 안기부도 반대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주무 장관인 이범석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 의견을 낸 대통령의 측근 인물을 향해 비속어를 사용하며 반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안기부는 버마가
 북한의 테러 위협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지만 대통령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고 몇 년이 지난 후에 한 미디어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 결정은 대통령 자신의 은퇴 이후를 고려한 조치였다. 전 대통령은 이전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단임으로 임기를 끝낸다는 것을 자신의 주된 정치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충성스러운 측근 한 명이 임기 이후에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버마의 네윈이 그 모델이라는 진언을 했다는 것이다. 즉 버마에서 네윈 체제를 숙지할
기회도 있고 아울러 네윈과 개인적인 교분을 쌓을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는 설명이다(이것은 억측이고
버마는 단지 항로상의 편의 때문에 추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웅산 테러 발생 직후 버마의 실력자 네윈 인민계획당 의장이 전두환 대통령의 숙소인 영빈관으로 찾아와 사과와 함께 범인
 색출을 다짐하고 있다.
중앙포토
 
 
여하 간에 외무부의 반발과 안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마는 일정에 추가됐다. 순방국들 중에는 공식적으로는 인도가 가장 중요한 나라이고 나머지는 호주, 뉴질랜드, 스리랑카와 브루나이였다. 대통령과 정부의 요인들 그리고 주요 기업인들을 포함한 대규모의 순방 일행은 10월 8일 김포 국제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30분 랑군(양곤의 옛 이름)에 도착했다.
 
대통령 부부가 트랩을 내려 올 때에 21발의 예포가 울리고 버마 대통령인 우산유(U San Yu) 부부와 이계철 한국 대사가
마중을 나왔다. 쾌적한 서울의 가을 날씨와는 달리 랑군은 덥고 습기에 찼다.
 
이보다 3주일이나 앞서 3인조의 북한 테러리스트들이 버마에 비밀리에 상륙했는데, 진모라고 알려진 리더 격인 본명 김진수 소좌와 신기철 그리고 강민철 대위였다. 한국 정부가 대통령의 순방 계획으로 분주한
 사이에 북한 정부는 이들을 살해할 준비에 열중한 셈이다.
 
특히 특수 임무를 부여 받은 3인은 염천 하에서 임무 수행 준비로 고된 훈련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강민철은 마지막 순간에 선발이 되었다.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휘부가 통신 전문가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강을 추가한 것이다.
3인은 9월 9일 버마로 가는 북한 화물선 ‘동건애국호’에 탑승해 항해 도중에는
선실 내에서만 생활을 하고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건애국호는 9월 15일 랑군 강 입구에 도착해 하역작업을 완료했지만 선박의 수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며칠간 더 체류 허락을
받았다. 그 사이에 3인조는 랑군에 잠입해 북한 외교관의 숙소로 인도되었다. 이틀 후 거사에 쓸 폭발물이 배달되었다.
10월 6일 이들은 거처를 떠나 테러의 현장이 될 아웅산 묘소가 있는 쉐다곤 공원과 칸다기 호수 부근을 정찰했다.
 
이후 이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노숙을 했고, 다음 날 새벽 2시 아웅산 묘소에 잠입해 동료 두 명이 밑에서 기다리는 사이 신기철이 기념관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진모가 아래에서 폭발물 3개를 올려주자 이를 지붕 속에 감추었다. 한 개는 원거리 작동 폭탄이었고
다른 한 개는 폭발의 충격으로 터지게 돼있는 고성능 폭탄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화재를 일으켜 증거를 인멸할
 목적으로 숨긴 소이탄이었다.
 
강민철 “현장 보이는 곳서 터뜨리자”

9일 아침에는 일찍 약한 비가 뿌렸지만 곧 개고 습기 차지만 좋은 날씨가 되었다. 범행 직전 진모와 강민철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강민철은 아웅산 묘소가 내려다보이는 쉐다곤 파고다 맨 위층에서 원격 조종 장치를 작동해 폭발물을 터뜨리자는 생각이었는데, 진모는 그곳이 관광객이 많아 신변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반대하며 남한 사절단을 태운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거리에서 거사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사이의 이견에는 공작이 성공한 후의 논공행상을 염두에 둔 면이 있었다. 후일 강은 진모가 이번 공작이 전적으로 자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본국에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강의 의견을 따랐더라면 이들의 작전은 반만의 성공이 아닌 완전한 성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들은 묘소에서 약 1㎞ 떨어진 위자야 극장 앞에서 구경 나온 군중 틈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한국 방문단은 10시 조금 넘어
호텔을 출발해 묘소에 도착한 후 정렬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머무르고 있던 영빈관에서는 10시15분에 그곳에 와서 대통령을 수행해 함께 묘소로 가기로 한 버마 외무장관 유칫흘랭(U Chit Hlaing)이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아 초조하게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약속시간에 4분이 지나 도착했고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로 예정보다 3분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북한의 3인조가 군중 틈에서 초조하게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10시24분 검은색 벤츠 한 대가 한국 국기를 날리며 앞뒤에 모터사이클 경호를 달고 그들 앞을 지나갔다. 이 차는 1분 후 묘소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은 이계철 대사였다.
대사는 기다리고 있는 인사들에게 대통령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행이 새삼 모습을 정돈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일행은 행사 준비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다.
 
 군중 틈에 섞여 있던 3인조의 리더 진모는 나팔 소리가 난 후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원격 조종 장치를 눌렀다. 현장은 큰 폭발음과
동시에 번갯불 같은 섬광과 아울러 맹렬한 폭풍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캄캄한 암흑에 덮이고 물건들의 파편과 함께
 사람의 몸에서 찢겨진 살점들과 뼛조각이 사방에 날리면서 흩어졌다.
 
그 잔해 밑에 한국 정부의 최고위 관리 17명과 4명의 버마인의 찢겨진 몸들이 널려 있었다. 묘소에 근접하고 있었던 대통령의 차량 행렬은 비상사태를 감지하고는 바로 방향을 돌려 숙소인 영빈관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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