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12월 21일 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그는 누구보다도 이날을 기뻐했다.
[2] 朴正熙, The Last Samurai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이는 1955년 10월 8일 UN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이 한 말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메논이 일주일동안 방문후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그는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사회는 혼란과 가난, 그 자체였다. 6.25이후 한국은 생산시설 파괴로 인해 외국의 원조로 생존할 정도의 어려운 시기였다.
1960년 말 경제 사정을 보면 일인당 GNP는 단돈 82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2천3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무역규모는 대만, 필리핀에도 훨씬 못 미쳤다.
이외에도 1960년 당시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분석 자료에 한국의 실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곳이다. 국민성은 게으르고 문맹률은 높으며 정치적 미숙에다 경제적 빈곤이 겹친 나라,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군사적 불안 등 온갖 부정적 요인을 안고 있어서 가망이 없다”
실제로 1964년 한국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이미 일본은 5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고, 태국은 7억 3천 6백만 달러, 필리핀은 4억 5천8백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다섯 배 정도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점이었다.
특히 북한은 남한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6.25로 피폐할 대로 피폐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초 이미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한 상태였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경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따라서 북한은 남한보다 10년 앞서 경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경제개발에 대한 박차를 가했다. 우선 박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의 한국 경제 상황은 4.19와 5.16으로 인해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혁이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급격히 감소하고 원조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라인은 기존의 미국에서 일본으로 서서히 전이되는 과정에 있었다. 한국이 이런 변화에 적응해 가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고, 경제개발의 목표를 위한 투지를 불태웠다.
박 대통령은 농업부문을 경제계획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농산물 가격안정‘등 일련의 중농정책을 펼쳐나갔다.
이와 함께 그는 자원의 빈곤에서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인력개발을 통한 수출만이 경제개발의 관건이라고 결심하고 수출 진흥에 역점을 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했다.
공업화에 중점을 둔 박 대통령의 산업정책으로 말미암아 정부는 1961년 7월 22일, ‘종합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66년까지를 기간으로, 이승만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했던 만성적인 가난을 타파하려 했다.
박 대통령은 ‘모든 사회 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 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등 주요역점 사업을 발표했다.
그 결과 국민총생산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했고, 2차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차츰 공업국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제 2차 경제개발 결과 공업부문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67년의 8.9%의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성장의 발판을 닦은 뒤 69년에는 15.5%라는 성장률을 보여 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3차 계획(1972~76)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기간동안 한국은 연평균 10.2%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수출 액수도 거의 배수 이상으로 성장했다.
박정희는 제 3차 5개년 계획의 중점목표로 ‘농어촌 경제의 혁신적 개발, 수출의 획기적 증대 및 중화학 공업의 건설’을 정하고, 이러한 노력으로 새마을 운동을 벌이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주도형 개발전략과 공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 공업화정책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과감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의 성과로 한국은 60년대 농업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었고, 70년대를 지나는 동안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됐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집권 당시부터 시급히 요구됐던 국방력 강화에도 큰 진전이 있었고, 국민생활도 현저히 윤택해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하버드대학교 국제개발연구소(HIID)가 공동 저술한 ‘한국경제-사회의 근대화’에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1년 연간 7%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60년대 초반의 경제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성장목표는 어처구니없이 높다고 여겨졌으나 결국에는 초과 달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과 65년에 경제 자유화 계획(시장자유화 정책)이 도입되고 1964년~67년 수입대체 지향형 경제를 수출 지향 형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고도성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한국경제의 역량은 개발정책 수립에 있어서 보다도 그 시행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발휘된다. 뮈르달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은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을 가진 양성국가'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