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동궁 생활은 어땠나요.
“내 처소에서 ‘애기손님(유모)’하고 생활했습니다. 아침에 씻고 옷 입고 어머니께 문안 절 하고, 겸상을 한 뒤 학교에 갔지요. 아버지가 궁에 계시면 아버지가 드시던 수라상이 그대로 물려 나와 어머니와 제가 먹었어요.”
●궁중음식 맛있지 않나요.
“항상 아주 깔끔한 음식만 올라와 오히려 맛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가끔 상궁들에게 ‘나도 두메에서 자라 시래기 같은 거 좋아한다. 너희들 먹는 것 좀 가져와라’ 하시곤 했어요. 저도 일부러 식사 시간에 늦게 가서 상궁들과 함께 구수한 시래기국을 같이 먹기도 했지요.”
소녀 이해경은 경성유치원을 나와, 경성여자사범부속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유치원은 덕혜 옹주를 위해 고종 황제가 덕수궁 안에 세웠던 유치원으로, 해경은 이완용의 손녀딸 등과 함께 그곳을 다녔다.
●학교생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께서 학교에 특별 대우를 하지 말라고 청을 넣었어요. 저도 친구들과 똑같이 놀려고 애썼어요.
그래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도시락 찬밥을 못 먹었어요. 그래서 유모가 목판에 따뜻한 밥을 국과 함께
가져오면 숙직실에서 혼자 앉아서 먹었지요. 잠깐 그렇게 하다 다시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는데,
찬밥이 안 넘어가서 매일 그냥 가지고 갔죠. 들키면 어머니한테 혼나니까, 유모가 몰래
궁 안으로 자장면을 시켜줘서 먹곤 했어요.(웃음)”
●친구들이 부럽지는 않던가요.
“하루는 하교 후 유모가 오기 전에 몰래 친구네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저녁에 궁에서 사람이 와 저를 데려갔는데, 어머님이 모른 척하고 ‘어디 갔다 왔니?’ 하시더라고요. 당시 중일전쟁 때문에 상이군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상이군 위문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죠. ‘그래? 뭐했어’ 물으시기에 ‘노래했어요’라고 했더니 ‘해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했죠. ‘그리고 또 뭐했어?’ ‘춤 췄어요.’ ‘그래? 춰봐.’ 이렇게 몇 번을 거짓말했더니 어머니 눈꼬리가 올라가시면서 “이년!”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얼마나 꼬집으시던지··· 그래도 전 잘못했다고 안 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느냐는 반항심 때문이었죠.”
②고종황제 장례식에서 의친왕비와 이해경의 큰오빠 이건. (1919)
낳아준 어머니 신여성 김금덕
●생모는 그립지 않던가요.
“열세 살 때 처음 만났어요. 화신상회에서 만났는데, 저를 딱 붙들고는 ‘잘 있었냐?’ 그러는데 저는 속으로 ‘이 사람, 나한테 왜 반말을 하지?’ 그랬어요. 궁에서는 의친왕비 빼놓고는 모두 제게 존대를 했거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미안하더라고요.”
이해경이 대학을 졸업한 지 한 달 만인 20세 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의친왕은 부인과 후실들,
자녀들, 고종 황제의 후궁들까지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갔다. 이 여사는 혼자 미군 트럭을 타고 대구로 내려갔고, 거기서 또 히치하이킹을 해서 부산에서 피란을 하고 있는 가족을 찾았다.
가서 보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피란터에서도 후실들의 알력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어요. 방 하나에 의친왕과 의친왕비,
후궁과 아이들이 잠을 잤지요. 방 가운데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던 게 기억나요.”
해경은 붙드는 의친왕비의 손길을 뿌리치고 친구가 하는 다방에서 의자 4개를 붙여 잠을 자며 지냈다.
그러다 자신을 찾아온 생모를 따라 수복 후 서울로 올라왔다.
●생모와 함께 사는 것이 적응이 되던가요.
“어색했지요. 항상 거리감이 있었죠. 생모는 여걸이었는데 그것도 항상 불만이었어요.”
생모 김금덕 여사는 신여성이었다. 경성보육학교를 나와 신식 파마 머리와 뾰족구두를 신은 보험회사 직원으로 의친왕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 후 의친왕의 배려로 궁 안의 보육교사로 취직했다가 이해경을 낳았다. 의친왕에게 대들다 쫓겨났지만, 재혼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특히 여성으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활동을 하다 동네 노인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던 페미니스트였다. 선거는 모두 낙방했다. 이렇게 생모와 지내던 이해경이 오랜만에 문안을 갔을 때, 의친왕은 이미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누구예요?” 물으시더군요. 어머니가 ‘누구긴 누구예요, 다섯째 따님 해경이죠.’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세요. ‘해경이가 누구예요!’ 당신이 지어주신 아명은 길상이었거든요. 어머니가 다시 ‘길상이에요, 길상이’ 그랬더니 그제야 ‘아, 길상이오~’ 그러시더라고요.”
의친왕의 장례를 치른 지 1년 후인 1956년 해경은 미국으로 떠났다. 왕가와 생모 쪽 모두 연을 끊으려는
결단이었다. 의친왕비는 “이제는 못 보겠구나”라면서 당신이 입던 원삼과 치마, 저고리를 내놓았다. 이해경은 이 옷들을 간직하다가 최근 경기여고에 모두 기증했다. 그녀는 꼬박 사흘이 걸려 미국에 도착했다.
손에는 의친왕비가 사준 야마하 피아노를 팔아 비행기 값 650달러를 치르고 남은
80달러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성악을 공부했다.
③성북동 의친왕 별장에서 열린 이영(의친왕의 첫째 딸)의 결혼식. 앞줄 왼쪽 넷째가 의친왕,
앞줄 오른쪽 넷째가 의친왕비, 다섯째가 네 살 된 소녀 이해경. 그 옆이 신부 이영. (1934)
●미국 생활이 어렵지 않으셨나요.
“떠나오면서 어머니께 ‘4년만 있다 온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결심이 굳었었죠. 미국 주소도 안 가르쳐줬고, 편지도 답장을 안 했습니다. 어찌 보면 미국에 와서 제가 살았는지도 몰라요. 남아 있었다면 자살을 했든지, 미쳤든지 타락을 해서 몹쓸 사람이 됐을 거예요. 미국 생활이 오히려 좋았어요. 재미있었죠.”
●무엇을 하셨어요.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고, 뉴욕으로 와서 음대 대학원 진학을 계획했어요. 하지만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할 엄두가 안 났어요. 그래서 일본 백화점에 취직해 매니저 비서로 일했습니다.”
④큰오빠 이건이 타고 다니던 롤스로이스 자동차.
⑤7세 때 순정효황후가 선물로 주신 프랑스 인형과 함께.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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