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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150주년, 전쟁 의지가 평화를 보장한다 "남북전쟁 모르면 오늘의 미국 알 수 없다"

淸山에 2011. 6. 18. 05:53

 

  
 
 미국 남북전쟁 150주년, 전쟁 의지가 평화를 보장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1.06.18 01:30 

 

“남북전쟁 모르면 오늘의 미국 알 수 없다”
링컨, 잔혹하게 전쟁 수행 … 승리 뒤 반역 책임 묻지 않았다
내전 뒤 연방 재통합 … USA, 복수서 단수로 바뀌었다

 

US Marine corps band - Battle Hymn of the Republic

 
 
 Dixie's Land 남군의 국가로 불리운 곡 3종류
1. 가사 있는 버전 (Ernest Tubb 버전) 
 
2. 가사 없는 버전 
 
3. BonnieBlue Medley버전. 
 

 

 

  
 
 

내전(內戰·Civil War)은 피의 잔혹사다. 적개심과 증오감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거칠다. 내전의 악마적 속성이다. 6·25 한국전쟁, 스페인 내전도 처절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내전에 돌입한다. 북부(연방·Union)와 남부(연합·Confederacy) 주(州)들 간의 전쟁이다.
 
그 전쟁(1861~1865) 4년간 62만 명이 전사했다. 20세기 전쟁 (1차·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전체의 미군 전사자를 합한 것보다 많다. 폭격기·탱크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주검의 무게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올해가 남북전쟁 발발(勃發) 150주년(Sesquicentennial)이다. 요즘 미국에선 기념행사, 재연(Reenactment) 이벤트가 풍성하게 벌어진다. 미국 역사학자 셸비 푸트(Shelby Foote)는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의 정수(精髓), 국가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 전쟁을 모르면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전쟁은 낭만적으로 시작됐다. 1861년 4월 12일 새벽 첫 포탄이 발사됐다. 장소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섬터 요새
(Fort Sumter). 찰스턴 항구에서 1.6㎞ 앞의 작은 섬(200X180m)에 만든 요새다.
 
 그 요새는 북군 주둔지다. 남부 연합 정부는 90명의 북군에 철수를 요구했다. 건너편 항구에서 남군은 대포를 쏘아댔다. 30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36시간 뒤 북군은 항복했다. 요새는 파괴됐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찰스턴은 승리를 축하하는 퍼레이드로 북적댔다. 사망 없는 첫 전투와 퍼레이드는 전쟁의 환상을 심었다. 남북 어느 정부도 잔인하고 지루한 유혈(流血)의 무대가 개막됐다고 예감하지 못했다.
 
 전쟁 전야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등장으로 깊어갔다. 1860년 11월 대선에서 그는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골 변호사 출신 링컨의 당선은 행운이었다. 대선 이슈는 노예제 존폐였다. 흑인 노예는 남부 노동력의 근간이다. 링컨은 노예제를 반대했다. 급진적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남부는 링컨을 거부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미국 연방에서 처음 탈퇴(secede)했다. 최종적으로 남부의 11개 주가 떨어져 나갔다. 1861년 2월 남부는 나라를 새로 세웠다(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링컨의 대통령 취임 전이다. 대통령(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도 뽑았다. 웨스트포인트 육사 출신의 데이비스는 국방장관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미국은 수도 워싱턴을 경계로 위와 아래로 분열됐다. 링컨은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헌법 파괴의 ‘반란’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링컨의 권한은 북부(19개 주) 대통령으로 축소됐다.
 
 지금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가면 남부 연합의 분위기가 건재하다. 주도(州都) 컬럼비아의 정부 청사 광장에 높이 20m짜리 깃대가 서 있다. 거기에 아직도 남부 연합 국가의 깃발이 걸려 있다. X자 모양의 십자가에 13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남부 역사의 진원지임을 과시한다.
 

게티즈버그(펜실베이니아주) 전투는 사흘간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게티즈버그 연설 장소 부근에 세워진
 링컨 흉상과 당시 북군의 대포.
 
 
 
 

 

 
 
 
 섬터의 항복은 워싱턴을 긴장시켰다. 링컨은 정부를 전시체제로 바꿨다. 지휘관 발탁은 우선순위였다. 링컨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로버트 리에게 연방군 사령관(소장) 자리를 제의했다. 나이 52세의 대령. 리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링컨의 노선을 인정했다. 하지만 리는 거부했다. 고향 버지니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었다. 버지니아주는 연방을 탈퇴했다. 링컨(16대) 이전까지 15명의 대통령 중 7명이 버지니아 출신이다.
 
 버지니아의 그런 상징성은 남부의 위상을 강화했다. 남부 연합 정부는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를 수도로 삼는다. 워싱턴~리치먼드 사이 100마일(160㎞)이 주요 전투장이 된다.
 
 리는 워싱턴을 떠난다. 지금의 알링턴(Arlington) 국립묘지 자리는 리의 땅이었다. 북부 군대가 그의 집과 정원을 점령해 묘지로 만들었다. 알링턴 국립묘지 언덕에 리의 집이 남아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묘소 위쪽이다.
 
 북부의 정치인·언론인들은 섬터의 패배를 설욕해야 한다고 흥분했다. 3개월 뒤 전쟁의 본격적인 막이 오른다. 1861년 7월 버지니아주 매너서스(Manassas)-. 워싱턴에서 서남방 20마일쯤 떨어진 곳이다. 북부는 불런(Bull Run) 전투라고 부른다. 여전히 전투 호칭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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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단체, 기념사업회들마다 매너서스 전투 150주년 행사의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 5월 말 매너서스 근처 한 마을의 준비 모임을 찾아갔다. 남군으로 나갈 역사체험 요원(re-enactor) 80여 명이 모여 있다. 남군 색깔인 그레이(gray) 군복에
머스캣 소총을 들고 있다.
 
 그들은 토머스 잭슨(Thomas J. Jackson) 부대 요원이다. 잭슨 부대는 스톤월(Stonewall·장벽)이라는 무적의 신화를 가졌다.
 
 매너서스 국립 전적지 공원에 가면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여기 잭슨이 장벽처럼 버티고 있다’. 그 글귀는 잭슨의 전설을 압축한다.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유인하고 기습하라’는 게 그의 용병술이다. 그것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게릴라 전법과 비슷하다.
 
 준비행사는 중대 지휘관(대위)을 뽑는 것으로 시작했다. 선출된 사람은 헨리 로런스(53세). 전직 도서관 사서다. 그에게 물었다.
 
●지휘관을 투표로 뽑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부 장교들 대부분이 대령까지 투표로 뽑혔다. 부대원들은 자신의 생명을 책임질 지휘관의 선출이기에 아주 신중했다. 생존본능이 발동된다. 때문에 가장 유능한 장교가 뽑힐 수 있다.”
 
 그가 “어텐션(attention·차렷)” 하고 부대원들을 정렬시킨다.
 “북부의 양키(Yankee)들이 미국의 건국정신을 망쳤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주 자치권을 중시했다. 연방 탈퇴는 주정부의 독자적 권한이다. 링컨은 연방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키려고 음모했다. 총을 들어라.” 그의 훈시는 전쟁 때 남군의 대의(大義)명분이었다.
 이어서 큰소리로 “레프트 페이스(left face·좌향좌)” “포워드 마치(forward march·앞으로 가)”를 외친다.
 
 어깨를 맞댄 밀집 형태의 전진이다. 횡대 15명씩 총검을 꽂은 채 나아간다. 나팔소리와 함께 “차-즈(charge·돌격)” 하는 함성.
 
 “밀집 대형은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1815년 나폴레옹 시절의 대형이다. 50년 후 남북전쟁의 기본 전술이었다. 하지만 무기는 발전했다. 총의 사정거리가 4배(400야드)로 늘었다. 대포의 위력은 커졌다. 때문에 그런 대형은 치명적인 대량 학살을 초래한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1. 남북전쟁 때 죽음의 결전이었던 게티즈버그 전투. 그 3일간의 전투가 미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남북 기병대원으로 분장한 재연 행사자들이 근접전을 펼치고 있다.
2. 그레이 복장에 머스캣 소총을 지닌 남부연합군 재연 요원들. 남부는 대령까지의 지휘관을 부대원 투표로 뽑았다.
3.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의 백악관. 1818년 건축된 건물로 리치먼드에 남아 있다.
4. ‘매너서스 패배로 북부는 충격에 빠졌다’. 전투는 단기전의 낭만적 희망을 깼다(당시 신문기사).
5. 종전 138년째인 2003년 남부 수도였던 리치먼드에 처음 세워진 링컨의 동상. 북군의 리치먼드 점령 때 막내 아들 테드와 이곳에 함께 왔던 장면을 묘사했다.

 매너서스 전투는 행락객들과 함께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투 소식을 연극의 전쟁놀이로 연상했다. 전투 현장에 몰려갔다. 마차에 소풍 도구를 실었다. 착각은 깨졌다. 북군은 5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참패했다. 구경꾼들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 잔인한 살상극임을 깨달았다.
 
 그 지휘관은 덧붙인다. “링컨, 데이비스 모두 길어야 6개월 정도의 단기전쟁으로 여겼다. 일반 군인들도 처음엔 전쟁을 낭만적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삶의 경험으로 여겼다. 애국심도 충만했다. 모험심과 애국심으로 전선에 나갔다.”
 
 워싱턴은 충격에 빠졌다. 신문은 "남부 반란(Rebel)군에게 블루(blue·북 군복 색깔)의 전사들이 패퇴했다”고 전했다. 링컨은 재기를 모색했다. 그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된다. 죽음은 홍수처럼 쏟아졌다. 메릴랜드주의 앤티텀(Antietam) 전투 때 단 하루의 사상자가 남북 합해 2만5000명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쟁은 교착상태가 된다. 국력에서 북부는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남부는 인구(900만, 북부 1900만), 공업생산력(1대 11)도 열세였다.
 
 그럼에도 전선에선 남부가 대체로 우세했다. 전쟁 승패는 국력·전투력·외교력의 결산이다. 전투력의 핵심은 영웅적 리더십이다.
 리는 부하들의 애국심을 동원하는 역량을 지녔다. 리는 그들의 충성과 열정을 추출했다. 리의 리더십은 남부의 열세한 국력을 메워줬다. 리는 프레데릭스버그, 2차 매너서스 전투에서 승리한다. 거기에다 솔선수범, 자애심, 책임감이 더해져 그의 신화는 강화된다.
 교착상태는 남부에도 고민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국력이 큰 쪽(북부)에 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리 장군은 회심의 전략 카드를 꺼냈다. 수도 워싱턴을 위에서 압박했다. 1864년 6월 말 리는 7만5000명(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펜실베이니아로 들어갔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개막된다.
 
 리의 전략은 정공법이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손자병법과 다르다. 명쾌하고 직설적이다. 손자병법의 우회, 매복, 야간 기습에 익숙하지 못했다. 청교도 문화는 전략적 감수성을 억제했다. 중세 기사도적 접근은 사병들의 과도한 희생을 초래한다.
 
 병사들은 돌격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군인들의 용맹성은 무모할 정도다. 남북 모두 정의가 우리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죽음보다 두려워한 것은 비굴, 겁쟁이(coward)라는 말이었다. 엄폐물에 숨거나 엎드려 쏴 자세 자체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리는 게티즈버그에서 패한다. 3일간 전투에서 남북 합해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남북의 각 주들은 1000여 개의 위령탑· 추모비·동상을 세웠다. 링컨의 흉상도 있다. 거기에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조각돼 있다.
 
 링컨은 말의 위력을 알았다. 리더십의 언어는 대중의 상상력과 비전을 장악한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그 사례다. 3분짜리 연설은 272개의 짧은 단어로 구성됐다.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켜야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로 끝난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인권·평등의 지배 언어가 됐다. 이라크 침공 때 내건 조지 W 부시의 ‘자유의 확장’은 여기서 출발한다.
 
 전황은 다시 교착상태였다. 링컨은 자신의 전쟁철학을 실천할 지휘관을 찾았다.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와 윌리엄 셔먼(William T. Sherman)이다.
 
 링컨은 그랜트를 최고사령관(중장)으로 임명한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 중장은 처음이다. 그랜트와 셔먼은 오하이오주 출신이다. 지금까지 오하이오는 버지니아 다음으로 많은 대통령(7명)을 배출했다.
 
 1864년부터 전선의 주역은 그랜트와 리로 바뀐다. 버지니아주의 윌더니스, 스팟실베이니아, 콜드하버에서 두 사람은 대결했다. 콜드하버에서 북군은 20여 분 공격 동안 7000명의 희생자를 냈다. 돌 진지를 향한 무모한 진격명령 때문이다. 그랜트는 연패한다. 그의 전술은 도살(屠殺)장으로의 초대장이었다.
 
참담한 피해로 북부에서 전쟁회피 분위기가 번졌다. 그해 링컨은 대통령 재선에 도전했다. 유권자들은 야당의 평화 협상론에 기울었다. 링컨은 낙선의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링컨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휴전으로 얻은 평화는 위선적이며 다시 깨진다는 게 링컨의 확신이었다. 철저한 승리의 전쟁의지가 정의롭고 완벽한 평화를 보장한다는 믿음이다. 전쟁과 평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그의 통찰이다. 링컨은 그랜트식 소모전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링컨의 냉혹한 전쟁관은 본격적으로 실천된다. 버지니아 전선에서 그랜트가 리를 붙잡는 동안 셔먼은 남부 깊숙이 진격했다. 셔먼의 초토화 작전은 잔인했다. 그는 남부의 심장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를 불질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장면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도 파괴했다. 남부 주민들은 몸서리쳤다. 남부의 항전의지는 무너진다.
 
 셔먼의 승전보는 선거 분위기를 바꿨다. 링컨의 인기는 올라갔고 다시 당선된다. 그것은 리더십의 일관성 덕분이다. 국정의 원칙과 소신을 유지하면 위기관리에 성공한다.
 
 워싱턴은 동상의 도시다. 동상은 전공(戰功) 순서대로 배치했다. 제1공훈자인 그랜트의 동상은 연방 의사당 앞을 위압적으로 장식한다. 셔먼 동상은 백악관 정문 왼쪽에 있다. ‘완벽한 평화’의 깃발은 베트남 전쟁에서 등장한다. 월맹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의 지론이다. 지압의 전쟁의지는 미군을 패퇴시킨다.
 
 
 
 
 

 

  

 
 

(위)1865년 4월 그랜트와 리의 항복 조인식 장면. (아래)남부 대통령 데이비스가 체포됐을 때 소지했던 권총(1851년 콜트 리벌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가 펼쳐진 곳.” - 리가 그랜트에게 항복한 곳인 애포머톡스(버지니아주)의 안내문이다. 항복 장소에 승자의 환희, 패자의 절망감을 담은 어떤 기념비·전적비도 없다.

 1865년 들어 남부의 전력은 바닥이 났다. 데이비스 대통령의 남군 정부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해 4월 리는 그랜트에게 항복한다. 버지니아주의 애포머톡스(Appomattox)-. 남군의 항복 장소다.
 
 애포머톡스가 드러내는 종전(終戰)의 이미지는 파격 그 자체다. 그곳엔 그 흔한 동상, 전적비나 기념비가 없다. 빛바랜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곳에서··· 리와 그랜트 그리고 그들의 피곤한 군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One of the Great Dramas)를 연출했다.”
 
 그 글은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절망감을 철저히 배제했다. 링컨은 남부를 ‘체제 반역’으로 규정했다. 62 만 명이 죽은 전쟁이다. 그렇다면 반역의 주동자를 전범 재판에 세우는 게 역사의 통상적 관례다. 그러나 애포머톡스는 그런 상식을 깬다. 양쪽 사령관 그랜트와 리 장군의 항복 협정문은 간단했다. “남군은 포로 서약을 한 뒤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반역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장교는 허리에 차는 무기(권총)와 말을 소유할 수 있다.” 대사면(大赦免)이었다. 링컨의 종전 정신이다. 그는 관용과 통합을 전후의 시대정신으로 제시했다. 반목과 원한의 감정을 재생산할 수 있는 어떤 기념비도 그 후에 세우지 않았다.
 
 링컨은 완벽한 승리를 위해 잔혹하게 남군을 몰아세웠다. 그리고 항복을 받았다. 그런 즉시 대사면을 베풀었다. 그 거대하고 파격적인 반전(反轉) 속에 링컨의 위대함은 존재한다. 그 대전환은 장엄한 서사시(敍事詩)적 감동이다.
 
 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체포나 처벌받지도 않았다. 대학총장(버지니아주 렉싱턴의 워싱턴 대학)으로 새 삶을 보냈다. 데이비스는 반역의 수괴(首魁)가 돼버렸다. 그는 항복하지 않고 탈출했다. 그리고 반역(treason) 혐의로 체포됐지만 반역과 관련한 처벌은 없었다. 그는 2년 뒤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다. 전범(戰犯)이 없는 전쟁, 반역을 응징하지 않은 내전-. 애포머톡스의 컨셉트는 내전 이후 국가 재통합의 롤모델이다. 전후 처리의 철학과 방식은 분단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링컨은 남부 항복 5일 뒤 암살당한다.
링컨은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노예해방 정책에서 실감된다. 1862년 9월 선포한 노예 해방령의 실제적 효과는 미약했다. 우선순위는 연방 재통합이었고 그 틀에서 노예 문제를 다뤘다.
 

애틀랜타(조지아주)의 스톤 마운틴(Stone mountain) 바위에 새겨진 남부연합의 간판 3인. 데이비스 대통령, 리, 잭슨 장군(왼쪽부터). 산중턱(120m 높이)에 미식축구장 3개 크기의 거대한 조각이다. 계획부터 완성까지 60년이 걸려 1972년 완성됐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은 아직도 꿈틀거리며 남아 있다. 링컨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뽑힌다. 하지만 남부에선 푸대접을 받는다. 리치먼드 중심가에는 데이비스의 동상이 서 있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비슷한 규모다. 리와 잭슨의 동상도 그 거리를 압도한다.
 
 하지만 링컨 동상은 왜소하다. 그의 신체 크기 정도다. 2003년에 남북전쟁 전적지 공원에 세워졌다. 놀라운 사실은 남부 주 전체에서 최초의 동상이라는 점이다.
 
 남부 대통령의 백악관이 리치먼드에 남아 있다. 그 옆에 박물관이 있다. 그곳의 대통령 집무실에 데이비스의 대형 초상화가 남부 연합 깃발과 함께 걸려 있다. 그 방은 남부의 전설과 자존심을 과시한다. 박물관 컨셉트도 남부의 정신을 재생시키는 데 있다. 전시장에 남부의 아이콘인 리와 잭슨의 대형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안내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전의 상처는 원한과 미움의 DNA로 전이돼 오랜 세대에 걸쳐 기억된다. 남부에서 링컨 동상은 거의 없다. 링컨의 비정한 남부 정복 때문이다. 내전이 남긴 정신적 상흔은 기묘하게 지속된다.”
 
 한국도 내전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 역사관 논쟁은 6·25 내전의 상처다.
 리치먼드의 링컨 동상은 소박하지만 강렬하다. 동상을 에워싼 돌담에 ‘나라의 상처를 꿰매자(to bind up the nation’s wounds)’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의 재선 취임 연설문(“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고···정의의 이름으로 나라의 상처를 꿰매자”)에서 따왔다.
 
 전쟁 이전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미 합중국)는 복수(are)였다. 주(州)의 연합체라는 인식에서였다. 그러나 전쟁 후는 단수(is)로 바꿨다. 전쟁은 나라의 일체감, 국민적 동질감을 단련시킨다. 남북전쟁은 미국을 새 출발시켰다. 미국은 1776년 처음 건국한다. 남북전쟁 종료 후 1865년의 연방 재통합은 제2건국이다. 미국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미국 게티즈버그, 찰스턴, 워싱턴, 리치먼드, 애포머톡스, 매너서스, 애틀랜타에서]
글·사진=박보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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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에 하우는 워싱턴 외곽에서 북군 부대가 <John Brown's Body>를 부르면서 행진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때 동행했던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 목사가 새로운 노래를 써보라는 제안을 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11월 18일 밤에 하우는 갑자기 시상이 떠오라서 이 곡을 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