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순서대로)
1. 남북전쟁 때 죽음의 결전이었던 게티즈버그 전투. 그 3일간의 전투가 미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남북 기병대원으로 분장한 재연 행사자들이 근접전을 펼치고 있다.
2. 그레이 복장에 머스캣 소총을 지닌 남부연합군 재연 요원들. 남부는 대령까지의 지휘관을 부대원 투표로 뽑았다.
3.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의 백악관. 1818년 건축된 건물로 리치먼드에 남아 있다.
4. ‘매너서스 패배로 북부는 충격에 빠졌다’. 전투는 단기전의 낭만적 희망을 깼다(당시 신문기사).
5. 종전 138년째인 2003년 남부 수도였던 리치먼드에 처음 세워진 링컨의 동상. 북군의 리치먼드 점령 때 막내 아들 테드와 이곳에 함께 왔던 장면을 묘사했다.
매너서스 전투는 행락객들과 함께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투 소식을 연극의 전쟁놀이로 연상했다. 전투 현장에 몰려갔다. 마차에 소풍 도구를 실었다. 착각은 깨졌다. 북군은 5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참패했다. 구경꾼들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 잔인한 살상극임을 깨달았다.
그 지휘관은 덧붙인다. “링컨, 데이비스 모두 길어야 6개월 정도의 단기전쟁으로 여겼다. 일반 군인들도 처음엔 전쟁을 낭만적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삶의 경험으로 여겼다. 애국심도 충만했다. 모험심과 애국심으로 전선에 나갔다.”
워싱턴은 충격에 빠졌다. 신문은 "남부 반란(Rebel)군에게 블루(blue·북 군복 색깔)의 전사들이 패퇴했다”고 전했다. 링컨은 재기를 모색했다. 그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된다. 죽음은 홍수처럼 쏟아졌다. 메릴랜드주의 앤티텀(Antietam) 전투 때 단 하루의 사상자가 남북 합해 2만5000명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쟁은 교착상태가 된다. 국력에서 북부는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남부는 인구(900만, 북부 1900만), 공업생산력(1대 11)도 열세였다.
그럼에도 전선에선 남부가 대체로 우세했다. 전쟁 승패는 국력·전투력·외교력의 결산이다. 전투력의 핵심은 영웅적 리더십이다.
리는 부하들의 애국심을 동원하는 역량을 지녔다. 리는 그들의 충성과 열정을 추출했다. 리의 리더십은 남부의 열세한 국력을 메워줬다. 리는 프레데릭스버그, 2차 매너서스 전투에서 승리한다. 거기에다 솔선수범, 자애심, 책임감이 더해져 그의 신화는 강화된다.
교착상태는 남부에도 고민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국력이 큰 쪽(북부)에 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리 장군은 회심의 전략 카드를 꺼냈다. 수도 워싱턴을 위에서 압박했다. 1864년 6월 말 리는 7만5000명(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펜실베이니아로 들어갔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개막된다.
리의 전략은 정공법이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손자병법과 다르다. 명쾌하고 직설적이다. 손자병법의 우회, 매복, 야간 기습에 익숙하지 못했다. 청교도 문화는 전략적 감수성을 억제했다. 중세 기사도적 접근은 사병들의 과도한 희생을 초래한다.
병사들은 돌격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군인들의 용맹성은 무모할 정도다. 남북 모두 정의가 우리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죽음보다 두려워한 것은 비굴, 겁쟁이(coward)라는 말이었다. 엄폐물에 숨거나 엎드려 쏴 자세 자체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리는 게티즈버그에서 패한다. 3일간 전투에서 남북 합해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남북의 각 주들은 1000여 개의 위령탑· 추모비·동상을 세웠다. 링컨의 흉상도 있다. 거기에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조각돼 있다.
링컨은 말의 위력을 알았다. 리더십의 언어는 대중의 상상력과 비전을 장악한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그 사례다. 3분짜리 연설은 272개의 짧은 단어로 구성됐다.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켜야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로 끝난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인권·평등의 지배 언어가 됐다. 이라크 침공 때 내건 조지 W 부시의 ‘자유의 확장’은 여기서 출발한다.
전황은 다시 교착상태였다. 링컨은 자신의 전쟁철학을 실천할 지휘관을 찾았다.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와 윌리엄 셔먼(William T. Sherman)이다.
링컨은 그랜트를 최고사령관(중장)으로 임명한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 중장은 처음이다. 그랜트와 셔먼은 오하이오주 출신이다. 지금까지 오하이오는 버지니아 다음으로 많은 대통령(7명)을 배출했다.
1864년부터 전선의 주역은 그랜트와 리로 바뀐다. 버지니아주의 윌더니스, 스팟실베이니아, 콜드하버에서 두 사람은 대결했다. 콜드하버에서 북군은 20여 분 공격 동안 7000명의 희생자를 냈다. 돌 진지를 향한 무모한 진격명령 때문이다. 그랜트는 연패한다. 그의 전술은 도살(屠殺)장으로의 초대장이었다.
참담한 피해로 북부에서 전쟁회피 분위기가 번졌다. 그해 링컨은 대통령 재선에 도전했다. 유권자들은 야당의 평화 협상론에 기울었다. 링컨은 낙선의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링컨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휴전으로 얻은 평화는 위선적이며 다시 깨진다는 게 링컨의 확신이었다. 철저한 승리의 전쟁의지가 정의롭고 완벽한 평화를 보장한다는 믿음이다. 전쟁과 평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그의 통찰이다. 링컨은 그랜트식 소모전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링컨의 냉혹한 전쟁관은 본격적으로 실천된다. 버지니아 전선에서 그랜트가 리를 붙잡는 동안 셔먼은 남부 깊숙이 진격했다. 셔먼의 초토화 작전은 잔인했다. 그는 남부의 심장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를 불질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장면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도 파괴했다. 남부 주민들은 몸서리쳤다. 남부의 항전의지는 무너진다.
셔먼의 승전보는 선거 분위기를 바꿨다. 링컨의 인기는 올라갔고 다시 당선된다. 그것은 리더십의 일관성 덕분이다. 국정의 원칙과 소신을 유지하면 위기관리에 성공한다.
워싱턴은 동상의 도시다. 동상은 전공(戰功) 순서대로 배치했다. 제1공훈자인 그랜트의 동상은 연방 의사당 앞을 위압적으로 장식한다. 셔먼 동상은 백악관 정문 왼쪽에 있다. ‘완벽한 평화’의 깃발은 베트남 전쟁에서 등장한다. 월맹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의 지론이다. 지압의 전쟁의지는 미군을 패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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