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포토저널리즘의 Big Four
●
한 장의 사진이 때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진이 현장을 가장 가감 없이 증거하고, 말과 활자보다 단박에 상황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그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실성을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진이 사건의 거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때로는 특정 관점에서 사건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대한늬우스?’ 따라서 사진이 ‘현실’을 포착한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것입니다. 그 사진이 왜 찍혔는지, 누가 그것을 유포했는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아무튼 19세기에 개발된 사진은 20세기 초부터 보도와 기록의 현장에는 빠질 수 없는 매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새롭게 세상을 접했고 그것을 역사의 기억으로 새겼습니다. 사진작가들은 충실한 현장 보도자이자 역사 기록자, 에세이스트이자 예술가, 그리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합니다. 책이나 TV, 광고물을 보다가 “아, 저 사진” 하고 반가워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리 찍었을까, 전설적 그 작품과 사진작가들을 만나봅니다. 소개하는 알프레드 아이젠슈테인, 마거릿 버크화이트,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다큐멘타리 포토저널리스트로서 동시대에 살면서 역사를 사진으로 증언한 ‘20세기 포토저널리즘의 빅포’입니다(빅포는 전적으로 라라와복래의 주관적 표현임다^^).
●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
Alfred Eisenstaedt 1898-1995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는 로버트 카파와 카르티에 브레송을 제치고 세기의 보도사진 기자로 뽑힌 바 있습니다. 아이젠슈테트가 카파나 브레송보다 잘 했던 것은 ‘엮음사진’(photo story)으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라이프>의 창간(1936)부터 종간(1972)까지 함께 한 그는 이야기로서의 사진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잡지의 품격을 높였으며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게 됩니다. 아이젠슈테트는 35mm 라이카 사진기를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인간의 감정을 극적 순간을 넘어서 포착하는 착안력이 뛰어난 작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아이젠슈테트의 눈>(1969)에서 그는 “모든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을 발견하고 포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V-J Day in Times Square, 1945
일명 ‘세기의 키스’로 유명한 사진입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과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뉴욕 타임스 스퀘어 광장으로 몰려 나와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던 시민들의 물결 속에서 뜨겁게 포옹하며 키스하는 미국 수병과 젊은 간호사. 근데 연인 사이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사이였다죠. 가두 행진을 하던 수병이 느닷없이 간호사를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던 것. 최근 개봉한 ‘박물관이 살아 있다’ 2편에서 주인공 래리가 이 흑백사진 속으로 들어가 여인과 키스하는 패러디 장면이 나옵니다. V-J Day는 Victory over Japan Day라고 합니다.
Violinist N. Milstein, pianist V. Horowitz, and cellist G. Piatigorsky, Berlin 1932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1903-1992),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1903-1976)가 1932년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협연을 하며 막간에 백스테이지에서 환담하며 쉬고 있는 모습. 러시아 태생의 이들 천재들은 유럽에서 활동하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각기 분야에서 20세기 거장이 됩니다. 이때 협연한 곡이 무엇인지는 사진 설명에 없어 모르겠으나 이후 세 사람이 협연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George Bernard Shaw, 1932
영국의 극작가이자 독설과 명언으로 유명한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의 집을 찾아가 찍은 사진입니다. 아이지(애칭)의 후일담. “1932년 버나드 쇼를 찍고자 런던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그 양반 괴팍해서 만나기 어려울 걸세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양반 채식주의자라며 하고는 바나나 한 다발과 사진 포트폴리오를 집으로 보냈지. 이틀 후 방문 허락을 받고 그의 집에 가자 쇼는 내 사진을 죽 훑어보더니만 이러는 거야. 나보구 포즈를 취해 달라구는 하지 말게. 내두 사진가거든...” 버나드 쇼의 임종 묘비명이 유명하죠.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크크
Goebbels, 1933
1933년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한 히틀러의 최측근 선전장관 괴벨스를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가를 곧 팰 듯한 눈빛을 아이젠슈테트는 장기인 스냅숏으로 잡아냈습니다. ‘악마의 눈빛’이라고 흔히 말하더군요. 대중 선동의 천재 괴벨스는 이미지를 각색하고 조작한 뒤 이를 언론과 방송 장악을 통해 배포하고 확산시킴으로써 나치즘을 신화화한 장본인입니다. 1945년 5월1일, 나치의 무대감독으로서 악마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괴벨스는 아내와 6명 아이들과 함께 동반 자살함으로써 그가 연출한 역사의 잔혹극을 스스로 마칩니다.
Children follow the Drum Major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1950
취주악대장을 흉내 내며 뒤를 졸졸 따라가는 아이들의 절묘한 모습이 배꼽 잡게 합니다. “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싶은 사진 중 하나가 바로 이 미시간 대학 취주악대장이 연습하는 모습이라네. 이른 아침이었는데, 웬 꼬마가 취주악대장 꽁무니를 따라가며 흉내를 내고, 이어 운동장에서 뛰놀던 아이들 무리가 그 꼬마 뒤를 따라가며 흉내 내고, 그래서 나도 그들 뒤를 따라가다 찍은 사진이야. 이거 완전 즉흥 사진이야. 절대 각색한 게 아냐.”
Marilyn Monroe, 1953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를 촬영할 무렵의 모습. “마릴린 먼로를 찍을 때 나는 카메라 1대에는 흑백필름을, 다른 1대에는 컬러필름을 준비했지.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컬러 사진은 단 2장만 제대로 나왔어. 내가 좋아하는 이 사진은 내 사무실 벽에 늘 걸어놓고 보는데, 할리우드에 있는 그녀의 집 작은 테라스에서 찍은 거네.” 아이지는 정치인ㆍ작가ㆍ배우 등 유명인사들을 많이 찍었는데, 여배우로는 마리네 디트리히,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소피아 로렌 등을 좋아했습니다.
●
마거릿 버크화이트
Margaret Bourke-White 1906-1971
“나의 삶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My life and career was not an accident.) 1938년 시사지 <라이프> 창간호는 표지에 웅장한 포트 펙 댐 사진을 싣고 초판 38만 부의 대박을 터뜨립니다. 마거릿 버크화이트가 그 사진의 작가입니다. 서방 기자로서는 최초로 죽음의 유태인 수용소의 참상을 전달한 기자이자, 애써 얼굴을 감추던 스탈린을 찍어 특종을 터뜨린 그녀는 사진을 단순한 현장 전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의 여론과 정치의 향방을 결정짓도록 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게 합니다. 헬리콥터나 마천루에서의 아슬아슬한 고공 촬영, 한편으로는 인간의 일상 모습에 정신세계까지 불어넣는 작품들은 ‘포토저널리즘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버크화이트에 바친 찬사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어 6ㆍ25전쟁 동안 많은 사진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때 걸린 뇌염이 원인이 되어(본인은 그렇게 믿었다지만 이에 대한 의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파킨슨병으로 사망합니다.
Gandhi at Spinning Wheel, 1946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사진이죠. 간디의 역사의식과 사상에 깊이 감명을 받은 버크화이트는 그를 제대로 취재하기 위해 물레질까지 배웁니다. "물레를 잣는 사람을 찍고 싶으면 그가 왜 물레를 잣는지 생각해 보라. 이해한다는 것은 찍는 일만큼 중요하다." 그 결과 버크화이트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간디의 정신세계를 완벽히 표현해냈습니다. “인도인들에게 물레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었다. 간디는 물레가 발휘할 경제적이고 영적인 힘을 빈틈없이 계산하고 있었다. (…) 비폭력이 간디의 좌우명이라면, 물레는 그의 가장 막강한 무기였다.”
Fort Peck Dam, First Cover of Life Magazine, 1936
버크화이트의 빛나는 순간은 1936년 <라이프 LIFE>지의 창간과 함께 합니다. 사진 위주의 시사저널 붐이 일어나던 그때 <라이프>는 대공황과 뉴딜 정책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하여 포트 펙 댐을 창간호 표지로 결정하고, 일찍이 건축 사진과 산업 사진에 일가견이 있던 버크화이트를 그 적임자로 선정합니다. 버크화이트가 주도하여 산업과 인간의 조화를 엮은 이 포토스토리는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시킨 계기로 평가받았습니다. 사진이 현장 기록을 넘어 기사의 관점을 보여줄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죠.
Margaret Bourke-White, Self-Portrait, 1943
마거릿 버크화이트에게는 ‘세계 최초, 여성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습니다. 버크화이트는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격동의 현장에서 역사를 찍고 세상을 담았습니다. 당시 사진가들은 거의 남성이었습니다. 카메라도 무거웠고 움직임이 많다보니 여성에게는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성들이 바지를 입지 않던 때 그녀는 바지를 입고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녀는 외국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소련 산업 단지를 촬영했고, 미공군 최초의 종군 사진기자로 유일하게 독일의 모스크바 공습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위 사진은 1943년 그녀 스스로 촬영한 셀프-포트레이트입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 돋보입니다.
Buchenwald, 1945
독일 바이마르 근교에 있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는 1945년 4월11일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대가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살아남은 유태인 수용자 대부분이 나치에게 끌려가 ‘죽음의 행진’을 한 뒤, 남은 수용자들은 너무 쇠약하거나 병들어서 걸을 수 없는 사람들뿐. 버크화이트의 부헨발트 사진은 나치의 잔학 행위를 믿지 못하던 세계인들에게 최초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좁게 들어찬 침상에서 느껴지는 공포, 의심에 가득찬 시선 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진은 ‘해방’의 고전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이보다 더 끔찍한 사진도 많습니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본회퍼도 해방 1달 전 이곳에서 처형당했습니다.
A DC-4 flying over New York City, 1939
이 사진은 달리 설명할 게 없는데, DC-4 여객기가 뉴욕시 맨해튼 상공을 나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여장부, 여걸다운 버크화이트의 기개가 느껴지지 않나요.
Margaret Bourke-White working atop the Chrystler Buildinr, NY, 1934
사진을 보니 어때세요? 아찔하시죠. 버크화이트가 1934년 뉴욕시 크라이슬러 빌딩 꼭대기에서 촬영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로프 같은 생명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입니다. 이 사진은 그녀의 조수 그라우브너가 찍은 것이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