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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 곽재구 시

淸山에 2011. 1. 26. 20:29
 

 

 
 

 

 

   

 

사평역에서  -  곽재구 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중앙일보 1981년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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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 역이고, 옛 '남광주역'이 모델이라고 한다.

부산에서 광주 쪽으로 가는 기차는 간이역 어느 한 곳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거의 모든 역을 쉬어갔다는데..

그렇게 남도의 모든 역을 거쳐온 기차는

이른 아침 남광주역에서 그만큼의 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그들이 이고 지고 온 세상의 등속들은

남광주시장과 도로변에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광주역'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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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inter Comes / Chris De Burgh

 

When Winter Comes - The Road To Freedom

Chris de Burgh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