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 곽재구 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중앙일보 1981년 신춘문예 당선작>
..................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 역이고, 옛 '남광주역'이 모델이라고 한다.
부산에서 광주 쪽으로 가는 기차는 간이역 어느 한 곳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거의 모든 역을 쉬어갔다는데..
그렇게 남도의 모든 역을 거쳐온 기차는
이른 아침 남광주역에서 그만큼의 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그들이 이고 지고 온 세상의 등속들은
남광주시장과 도로변에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광주역'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
When Winter Comes / Chris De Burgh
When Winter Comes - The Road To Freedom
Chris de Burgh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