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애송詩 모음

풀 - 김수영

淸山에 2011. 1. 15. 07:06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에서 김수영 시인이 말하는 '풀'은 가난한 민초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은 그 민초들을 마구 짓밟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겠지요.

시인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흐린 날, 바람보다 먼저 드러누웠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통해

가난한 민초들의 삶의 고달픔을 역설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언뜻 아주 연약하게 보이는 풀도 제 나름대로의 삶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민초들은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늘 저들에게 짓밟히고, 착취를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들은 마지막으로 숨겨둔 생명의 끈인 보리쌀 한 되마저도 몽땅 다 빼앗아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민초들은 "날이 흐리"면, 즉 권력이 미처 날뛰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때 토끼풀꽃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낀 그 가시나도 풀처럼 가늘고 연약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짓궂은 머스마가 은근슬쩍 농이라도 걸어보려고 하면

 바람보다 먼저 드러눕는 풀처럼 초가집 안으로 쏘옥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머스마들이 저만치 사라졌다 싶으면 또 다시 초가집 싸리대문 사이로

 얼굴을 쏘옥 내밀며 풀처럼 나에게 손짓하곤 했습니다

 

 

 

 

▦1921년 서울 출생

 ▦연희전문 영문과 중퇴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펴낸 모더니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시 2편 수록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행

 ▦1960년 4ㆍ19혁명 적극 지지, 참여시로 시풍 변모

 ▦1968년 평론가 이어령과 ‘순수-참여 문학’ 논쟁, 6월 교통사고로 사망

 ▦1981년 <김수영 전집> 간행 ▦200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해설 - 첨단과 정지의 변증법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풀’은 중요한 해석적 성과들을 많이 얻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듯하다. 이에 나름의 해석 하나를 제시해 보려 한다.

 ‘풀’은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이 균열과 모순을 안은 채 결합되어 있다.

 이 두 구조 사이의 관계는 ‘풀’ 뿐만 아니라 김수영 시 전체의 비밀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먼저, 표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대립 관계이다.

 구체적인 근거는 일곱 번 반복되는 ‘보다’(비교격 조사)와 두 번 등장하는 ‘더’(강세 부사)이다.

 ‘바람’은 가해자이고 ‘풀’은 피해자이자 극복자인 듯이 보인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대립(부정/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바람’을 ‘외세’ 혹은 ‘독재자’로, ‘풀’을 ‘민중’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풀’의 속성과 운명은 시의 공간에 내면화되어 존재의 정신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확장을 보여준다.

 따라서 ‘풀’은 민중이나 시인을 포함한 존재 전체, 혹은 역사적 ‘주체’를 상징하고,

 ‘바람’은 이 ‘주체’에 가해지는 ‘바깥의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내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호응 관계이다.

 숨은 구조가 은연중에 노출되는 지점은 1연의 ‘나부껴’(고통이 아닌 즐거움을 표현하는 동사)이다.

 ‘비’와 ‘동풍’은 ‘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물’과 ‘운동성’을 부여한다.

 ‘풀’은 ‘물기’를 머금어야 잘 자라며(따라서 ‘운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에 흔들려야 뿌리를 튼튼히 만든다(따라서 ‘눕는다’도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은 은총을 베푸는 자이고 ‘풀’은 수혜자가 된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하나의 진행과정으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풀’은 울어야 웃을 수 있으며, 누워야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풀’은 ‘주체’를, ‘바람’은 다른 세계에서 불어오는 ‘탈주체의 무의식적 잠재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이 다른 시 ‘절망’에서 말했듯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풀에게,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듯이 바람의 구원이 밀려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풀’은 표면 구조를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내면 구조를 함께 살펴야 이 시가 주는

‘은밀한 공감’이 해명될 수 있다.

 

 그런데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전자는 주로 참여시(민중시)의 관점과 관련되고,

 후자는 순수시(실험시)의 관점과 관련된다. ‘참여/순수’의 이분법이 횡행하던 1960년대의 시단에서,

 이 모순을 내포한 채 그것을 한 몸(시)에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것이 김수영의 시도였고

, 이 시도가 농축되어 마지막 작품 ‘풀’에 녹아들었다.

그리하여 순수와 참여, 첨단과 정지, 해탈과 풍자 사이의 간극을 자신의 몸(시)으로 메우려 한 노력이야말로

김수영이 한국시에 남기고 간 중요한 자취이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혹은 시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김수영의 시적 추구는

 모순과 균열을 안은 채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교훈을 준다.

 

 

 

 

 

Those Were The Days / Alex 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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